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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녹 May 18. 2024

[헤어질 결심] 마침내,

[헤어질 결심] 박찬욱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는 산에서 시작하여 안개 자욱한 거리를 지나 마침내 바다에서 끝을 맺는다.

138층 높이를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구소산 비금봉에서 시작된 그들의 이야기는 사자머리 해변 모래 구덩이 속에서 종적을 감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사랑은 산과 바다의 깊이만큼 그렇게 깊어진다.



'응시'는 해준과 서래를 이어주는 중요한 행위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형사인 해준은 용의자인 서래를 응시하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간다. 해준은 서래가 방문하는 월요일 할머니 집 앞에서 잠복수사를 하며 점차 서래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멀리 차 안에 앉아 망원경으로 서래를 쫓으며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서래의 곁에 선다. 커튼이나 물체에 가려 정확히 보이지 않는 서래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해준의 시선이 그려진다. 서래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며 녹음을 하는 해준은 응시를 넘어 그녀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사극을 보며 한국어를 배워 말을 고상하게 하나' 라며 단순히 '바라봄'에서 더 나아가 본인 나름대로 서래를 해석한다. '식후 흡연은 안 됩니다.' 라며 서래의 담뱃재를 받아주며 그녀의 곁에 잠든다. 이는 해준이 서래를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에 그치지 않고, 서래를 향한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서래가 고개를 숙이고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응시하며 해준은 말한다. '우는구나, 마침내.' 하지만 서래는 미소 짓는다. 해준의 꼿꼿한 응시에도 그녀는 희미하기만 하다. 서래는 해준의 눈을 가린다. 그녀는 해준의 불면증을 해소해 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의 눈을 감게 하고 그녀의 숨소리에 그의 숨소리를 맞추게 한다. 서래의 집 앞에서 서래를 바라볼 때에도, 402일 동안 헤어질 결심을 하던 그들이 다시 형사와 피의자로 만나 서로의 손에 수갑을 채운 채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해준은 깊은 잠에 빠진다. 그녀는 그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동시에 눈을 가려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해준은 사건 현장의 시체 앞에서 항상 안약을 넣는다. 그는 사실을 뚜렷하고 정확하게 응시하고 싶어 한다. 그는 죽은 남편을 말씀이 아닌 사진으로 보겠다고 답하던 그녀가 무엇이든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는 자신과 닮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서래는 해준에게 안개 같은 존재이다. 해준의 눈을 흐리는 존재, 서래는 항상 흐릿한 존재로 그려진다. 중국인이라 한국어가 부족하다며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모호한 대목에서 웃음을 짓고, 남편을 살해한 살인자와 가정폭력의 피해자 사이를 오가며, 청색으로 보였다 녹색으로 보였다 하는 원피스를 입고 해준의 앞에 다시 나타난다. 불분명한 경계를 넘나들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래에게 빠져들던 해준은 138층, 기름 바른 듯 미끄러워 기름봉이라고도 불리는 비금봉을 기어 오른 후에야 서래의 범죄를 똑바로 바라보게 된다. 마침내 똑바로 응시하게 된 해준은 비금봉 꼭대기에서 서래에 의해 추락사한 기도수처럼 서래에게서 떨어져 무너지고 깨어진다. 서래에 의해 붕괴된 그는 아내가 있는 이포로 떠나 꼿꼿하지 못한 채 안갯속을 헤맨다.


해준의 사랑이 끝나자 서래의 사랑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서래의 마음은 불분명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이포에서 해준의 앞에 나타난 그녀는 이전보다 분명하게 마음을 표현한다. 왜 그런 남자를 만났냐는 해준의 질문에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결혼했다 답한다. 헤어짐은 사랑을 전제로 하기에 서래의 대답은 분명하다. 하지만 해준에게 그녀는 여전히 안개 같은 존재이다. 부산에서의 서래가 그녀 자체의 불분명함으로 그려졌다면 이포에서의 서래는 해준에게 있어 불분명한 존재로 그려진다. 호미산에서 서래는 해준을 안고, 해준에게 키스한다. 서래의 헤드라이트는 해준의 눈과 얼굴을 비추며 그를 명확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해준은 형사와 피의자라는 관계를 재차 강조하며 본인의 눈을 부시게 하는 서래에게 명확한 경계선을 그으려 한다. 해준은 청색인지 녹색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는 한편 또다시 붕괴되어 버릴까 두렵다.



서래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 벽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 하길, 그렇게라도 해준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길 바란다. 그녀는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다. 스스로 바다 깊은 곳에 빠뜨려 아무도 못 찾게 하라는 해준의 사랑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모래를 파 작은 산을 하나 만들어 두고 파도에 쓸려 붕괴하는 산에 묻혀 영원히 사라진다. 단단하고 똑바르게 서있는 해준을 또다시 무너뜨리고 깨어 바다로 사라진다. 파도에 쓸려 내려오는 모래를 만지는 그녀의 손 위에서 해준은 서래를 찾아 영원히 바닷속을 헤맬 것이다. 402일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녀의 사진을 벽에 붙이고 잠도 못 자고 그녀 생각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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