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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녹 May 25. 2024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토끼와 편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토끼


나는 이 영화의 중심을 세 여자의 관계로 보았고, 그 중심은 ‘토끼’로 묘사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앤 여왕이 기르는 17마리의 토끼가 등장하는데 이들을 대하는 앤, 사라, 에비게일 세 여인의 태도는 서로를 향한 태도를 드러낸다.


히스테릭한 앤 여왕은 알고 보면 상처가 많은 여린 아이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17명의 아이를 잃었고 이는 그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픔이다. 이 상처는 그녀가 키우는 토끼들로 나타난다. 17마리의 토끼는 직접적으로 그녀가 잃은 17명의 자녀로 그려지며 앤은 그들을 가까이 두고 보듬는다.



이는 앤과 사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앤은 여왕이지만 실질적인 정치 실세인 사라의 말에 휘둘린다. 여왕은 꼭두각시처럼 본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며 정치적 소외감을 느낀다. 이들의 관계가 단순히 정치에 국한된다면 토끼가 그들 사이를 단단히 묶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앤이 사라에게 궁을 선물하겠다며 궁 모형을 보여주는 모습은 사라에 대한 그녀의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앤은 수시로 히스테리를 부리며 사라를 찾고, 투정을 부리면 사라는 그녀에게 달려가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그녀를 돌본다. 앤이 아플 때 밤새 그녀의 곁을 지키며 다리를 주무르면 앤은 안정감을 느낀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하지만 토끼를 대하는 사라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이자 사랑이기에 앤은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라 또한 그들을 예뻐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사라는 냉정하다. 토끼들에게 인사하라는 앤의 이야기를 무시하며 ‘내가 왜 그깟 토끼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그들에 대한 앤의 감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라의 냉정함은 앤에게 있어 양면성을 가진다. 토끼는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에 갇혀 지내는데 이는 앤의 슬픔이 억압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깊은 어딘가에 가둬둔다. 그래야 그녀가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라이다. 사라의 냉정함은 그녀의 뜨겁고 물컹한 아픔과 상처를 깊은 곳에 숨기고 애써 외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고, 여왕의 의무를 스스로 이행하지 않고 냉철하고 단호한 사라에게 의지하게 한다. 반면 이런 과정에서 앤은 상처를 받는다. 따듯하지 않고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사라에게, 자신의 진짜 상처는 경시하며 무시하는 사라에게 그녀는 서운함을 느끼며 실망한다.


이렇게 복잡한 두 여인 앞에 갑자기 에비게일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똑똑하고 억척스럽기까지 한 에비게일은 사라와는 다르게 앤에게 보들보들하게 다가간다. 인사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라와는 다르게 에비게일은 앤의 토끼들을 안고 보듬으며 우리에서 풀어준다. 그녀는 앤을 자유롭게 한다. 항상 사라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여왕의 일과 사생활이 그녀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앤의 아픔에 대해 귀담아듣고,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며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에비게일은 앤을 우리에서 풀어주며 춤추게 만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에비게일에겐 자신의 이득이 가장 중요하다. 권력, 돈, 명예 그 무엇도 없던 그녀에게 그것들은 탐나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녀 눈앞에 놓여 있고, 사랑하지 않는 귀족과 결혼을 하고 불쌍한 여왕의 환심을 사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앤의 상처나 남자의 사랑은 이용하기 딱 좋은 수단일 뿐이다. 결국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앤에게 사랑을 주는 듯 보이던 에비게일은 교묘하게 앤을 풀어주며 자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만든다. 이는 후에 사라가 쫓겨나고 점점 망가져가는 앤과 그녀 옆에 흥청망청 술에 취해 파티를 즐기는 에비게일이 토끼를 대하는 태도 변화에서 나타난다. 그녀는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우리 밖에 풀려 바닥에 돌아다니는 토끼를 발로 밟는다. 더 이상 여왕의 슬픔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치 않다. 그저 무시하고 짓밟을 대상으로 전락한다.



토끼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변화하는 셋의 관계로 보았을 때 영화의 엔딩 씬은 유난히 인상 깊다. 사라가 떠난 후 점점 망가져가는 앤과 여왕을 무시하는 에비게일. 그들은 어느 때보다 여왕과 신하의 관계를 형성한다. 수평적인 감정 교류보다는 수직적인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여왕은 자신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날뛰는 에비게일을 권력으로 누르며 무릎을 꿇고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게 한다. 여왕마저 자신의 발밑에 두고 싶은 에비게일은 끝내 무릎을 꿇고 머리채를 잡히며 여왕의 다리를 주무른다. 그들의 처연한 얼굴 위로 토끼들이 모인다. 끝내 그들의 얼굴은 토끼들로 뒤덮인다. 여왕은 에비게일과 사라 모두에게 믿음을 주었지만 그 결과 큰 상처를 입는다. 아마 이미 상처 난 입 안의 볼의 같은 자리를 또 씹은 것 마냥 아플 것이다. 에비게일은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처참하다고 느낄 것이다. 수치스럽지만 참고 살 수밖에 없는 비굴한 인생과 어떻게 해도 끝내 오를 수 없는 권력의 자리가 아플 것이다. 결국 그녀들의 슬픔과 상처는 토끼가 되어 그들을 뒤덮는다.



+ #편지 

’칼로 당신의 눈을 찌르는 꿈을 꿨어.‘


결말은 아프지만 그래서 나는 ’편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편지 또한 토끼처럼 세 여인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토끼는 그들의 슬픔과 탐욕을 드러내는 한편, 편지는 그들의 달큼한 속마음을 살짝 엿보는 느낌이어서 더 마음이 간다. 여기서 말하는 편지는 앤이 사라에게 전해주었던 수많은 사랑 편지들과 사라가 궁에서 쫓겨난 이후 앤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들에는 사랑과 협박이 담겨있다.


사라는 앤에게 보낼 편지를 수도 없이 고쳐 쓴다. 그러다 이런 대목도 나온다.

’칼로 당신의 눈을 찌르는 꿈을 꿨어.‘

앤의 마음을 돌리고,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고 하는 편지에 그런 말을 쓰려고 하다니 싶지만 사실은 사라의 사랑이 담겨 있다. 물론 끝내 편지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친구 사라가‘로 끝나는 편지는 결국 사라가 앤에게 편지를 보냈고 , 에비게일이 중간에 가로채서 편지는 타버렸고, 앤은 이를 끝끝내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남긴다. 하지만 이 편지가 전해지기 전, 후로 많은 감정들이 모인다. 앤이 이 편지를 고대하는 모습에서 사라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지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편지를 고쳐가던 사라가 ’친구‘라는 단어로 자신을 소개한 것에서 그녀의 진심이 느껴진다.


사라는 앤에게 받아온 연애편지를 공개하겠다며 여왕을 협박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편지를 태워버리는데 여기서 앤과 사라의 사랑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의 관계가 서로의 필요와 욕망에 의해 이어지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어떤 순간만큼은 얼마나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였는지, 진심이었는지 그 모든 편지들이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사라는 앤을 지켜주기 위해 그 편지들을 태웠고, 에비게일은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라의 편지를 태웠다. 흥미로웠던 점은 에비게일이 사라의 편지를 태우며 굉장히 슬픈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그 눈물 한 방울에서 많은 것이 느껴진다. 여왕에 대한 동정과 애정, 앤에 대한 사라의 진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에비게일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비애. 그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그 한 방울로 흘러내린 것 아닐까.


+

사람과 사랑은 참 이상하다. 사람마다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랑마다 드러나고 외면되는 상황이 다르다. 나는 결국 앤과 사라, 앤과 에비게일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관계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사랑 또한 욕망 아닌가. 분명히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원하는 방식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벽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완벽한 사랑은 무엇이고, 그것이 정의되었다 한들 존재하기나 할까.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느끼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랑이 복잡한 이유는 하나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사랑 외의 수많은 감정들, 과거의 경험, 현재의 상황, 미래의 욕망 등이 모두 합심하여 작용한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그것들과 상대의 그것들이 만나 상호작용 하는 꼴이니 얼마나 복잡하고 민감한 이야기인가. 그러니 앤과 사라의 관계는 사랑으로 작동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에비게일과 앤 또한 그렇다. 물론 사라와의 관계와 같을 수는 없지만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했던 순간에서 그들의 사랑이 있었다. 다만 에비게일의 상황과 욕망에 의해 금세 외면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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