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2개월까지 콧물 한 번, 기침 한 번, 열 한 번 나지 않던 딸아이가 13개월 차에 접어든 어느 날, 고열을 일으켰다. 체온계에 찍힌 높은 숫자에 처음으로 ‘자식의 아픔’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입맛을 잃은 건 당연하고, 라디오에서 흐르는 어떠한 말도, 노래도 내 귓가에 도달하긴 어려웠다. 머릿속엔 온통 ‘어떡하지?’, ‘얼른 열이 내려야 할 텐데’, ‘우리 아가는 얼마나 힘들까….’, ‘차라리 내가 아프지….’라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얼른 아기에게 해열제를 먹였다. 그리고 미지근하게 적신 수건으로 아가 몸을 닦으려는 순간!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눈물이 사정없이 흘렀다.
나는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나지 않아 큰 병을 앓았다. 나중에 알게 된 병명은 ‘폐렴’. 물론 지금이야 초기에 발견이 되면 고칠 수 있지만, 1980년대 초․중반만 해도 불치병에 가까웠다. 병원에서 1년을 넘게 살았으니 나의 ‘백일’과 ‘돌’ 잔치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막내딸의 첫 생일인데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어 카메라를 들고 병실로 갔지만,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진을 찍어 놓으면 나중에 부모님 마음만 더 아플 뿐입니다. 찍지 마세요.”라며 의사 선생님이 말렸다고 한다. 아마 고칠 방법이 없으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 흔한 백일 사진과 돌 사진 한 장이 없다. ‘돌잡이’는 또 어느 나라 말인가? 내게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나의 투병으로 언니는 시골 외할머니댁으로 보내진 지 오래였고, 엄마는 가뜩이나 약한 체력에 10kg이나 더 빠져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병세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나를 살리려 수도권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고칠 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배보다 더 커져만 가는 배꼽, 앙상한 뼈만 남아 원숭이 같은 모습, 작은 아가의 온몸은 이미 주삿바늘 자국으로 가득했다. 더는 사람이 할 수 없다면 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엄마는 기술이 아닌 기도로, 결국 나를 살리셨다.
미지근하게 적신 수건으로 딸아이의 고열을 내리려는 그 순간, 30년도 더 된 이야기로 눈물을 쏟았다. 가끔 내가 감기에 걸려 기침할 때마다 “따뜻한 물 좀 자주 마시라니까.”, “외출할 땐 옷 좀 신경 쓰라니까.”라며 잔소리가 심한 엄마인데…. 이제야 ‘엄마의 유난’이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