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니 에세이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12년 전, 중국 하얼빈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낯선 중국행에 겁이 났지만 기대감이 되레 컸어요.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회화 실력을 늘려야 했어요. 수업은 하루에 4~6시간 정도였고 나머지는 중국인 친구에게 1:1 과외 수업을 들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얼른 숙소로 돌아와 과제 및 예습과 복습을 하는데 시간을 보냈죠.
수업이 없는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 한 주간 배웠던 중국어를 사용하는 데 활용했어요. 버스로 10 정거장 이내는 웬만해서는 걸어 다녔어요.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간판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거든요.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종이에 메모해뒀다가 집에 돌아와 단어장에 정리했어요. 드라마를 보다가, 중국인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길을 걷다 간판을 보다가 등등 새로운 단어나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을 보면 모조리 그 안에 넣었어요. 지금도 가끔 단어장을 펼치곤 하는데, 내가 썼지만 스스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녜요.
“지니야, 오늘 애들이랑 다 같이 OO에 갈 건데 같이 가자!”
“미안, 나는 빠질게. 재밌게 놀다 와!”
“너 공부하려고 그러지? 휴일인데 그냥 좀 놀지, 독한 것.”
가끔씩 기숙사 친구들의 호출이 오곤 해요. 평일 내내 중국어 공부만 하다가 마음 편하게 모국어로 수다 떨고 싶은 마음, 나라고 왜 없었겠어요. 매번 하는 거절에 미안했지만 시간과 돈을 들여 중국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1년밖에 안 살았는데 중국어를 잘하시네요?”
“중국에서 대학교 졸업을 한 거예요?”
중국인 친구들과 어울린 탓에 귀국 후 입사했던 회사에서 이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었어요. 나는 집중력이 낮아 한 가지 일에 오랜 시간 몰두하지 못해요. 살면서 독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더욱 없고요. 하지만 중국어를 배우면서 알게 됐어요. 정말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일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동으로 독하게 되는구나,라고 말이에요.
이번엔 영어예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본래는 영어회화를 하려 영국 어학연수를 준비했어요. 영어 역시 잘하고 싶기 때문에. 2013년 겨울, 언제까지 영어를 머리로만 할 수는 없다 느꼈어요. 시작이 반이라고 근처 어학원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받고 바로 등록했어요. 퇴근 후에 수업을 들으면 회식이나 야근이 있는 날엔 빠지게 될 것 같아 아예 새벽 6시 20분 수업으로 등록했어요.
내 책 《꽂히는 글쓰기의 잔기술》에도 썼지만 당시 다니던 회사는 강남역 부근에 있었고, 우리 집은 인천이에요. 새벽 수업을 들으려면 4시에 기상해서 5시에는 광역 버스를 타야 지각하지 않아요. 감사히도 수업을 받는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지각하지 않았어요. 수업은 오전 8시 20분에 마쳤고요. 회사로 가기 전 아침식사로 빵이나 김밥을 사들고 사무실로 갔어요. 그리곤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죠. 텅 빈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으니 기분이 묘했지만 뿌듯했어요.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지인들은 내게 “미쳤다.”와 “독하다.”라는 말을 반복했어요. 하루에 3~4시간을 자고 일어나 새벽 6시 20분 수업을 듣게 한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지금 생각하면 학원의 철저한 관리도 한몫했지만, 함께 수업을 듣는 이들과의 친목도 영향을 미친 듯해요. 내가 독한 건 아무것도 아녔어요. 수업 때문에 6개월 동안 학원 근처에 있는 고시원을 얻은 기혼자도 있었거든요. 짧다면 짧은 6개월이지만, 주입식 교육으로 어렵게만 느꼈던 영어가 쉽게 다가왔어요. 무엇보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영어권 친구들과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죠. 잘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으면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동으로 하게 되네요.
어릴 때 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 엄마는 예쁘게 깎은 과일과 맛있는 빵을 가져다주시며 “지니야, 쉬엄쉬엄 해.”라고 하셨지만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었어요. 공부를 못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나 역시 잘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죠. 지금도 공부라면 두 손 두 발 들고 싶어요. 하지만 중국어와 영어는 예외였어요,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라 확실히 달랐죠,. 일단 공부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요. 그저 외국어 놀이일 뿐.
책을 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에요. 나는 글쓰기와 누구보다 막역한 사이예요. 휴대폰 안에 메모지를 이용해서라도 하루에 10줄 이상은 써요. 내용은 상관없어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떠오른 생각, 어제의 반성, 내일 해야 할 일, 영화 감상평, 생각나는 노랫말, 잊고 싶지 않은 기억 등을 적어요. 책 한 권을 집필하는 일이 곤욕이 아닌 행복이 될 수 있음은 메모하는 습관 덕분이라 생각해요. 물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도 여러 번이고요. 그럼에도 꿋꿋이 하는 이유는 좋아하고, 잘하고 싶기도 하지만, 꼭 해야만 하기 때문이에요. 내 나이 서른 중반이 되어 찾아온 이 귀한 손님께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직장을 그만둔 지 3년 반 만에 다시 회사원의 삶을 살고 있어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지만, 누구보다 행복하고 기뻐요.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기에 새벽까지 작업할 수는 없지만 한두 시간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감사해요. 일하면서 글을 쓰니 더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직장 생활하면서 책을 쓰는 거야? 너 참 독하다…”
끈기가 없다, 지구력은 너와 거리가 멀다 등은 늘 나를 대변했어요. 어느 누군가처럼 하나의 일에 몰두해 독하게 하고 싶었어요. “와, 너 참 독하다 독해.”라는 말을 듣는 게 소원일 정도였으니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말을 듣지 못한다면… 글쎄요, 좀 서글플 것 같아요. 내 안에 그만한 열정 하나 없이 살았다는 뜻일 테니까.
누군가에게 ‘독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뜻이니 걱정 말고 Keep go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