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응을 잘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해 OVER를 잘한다는 뜻이다. 어떤 일에 내가 막 웃고 손뼉 치면, (황당한 듯) “되게 좋아한다” “뭐가 그렇게 좋아?”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아니, 웃겨서 웃는다는데 그게 죄인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재밌다는데, 무섭다는데, 감동했다는데 그래서 내가 좀 표현하겠다는데 그리 잘못됐나? 나름의 이 고충을 한국계 미국인 언니에게 터놓으니,
“아, 음.. 지니! 유노? 넌 말이야, 네 안에 외쿡인 피가 흘러. 흥이 많은 거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유노? 난 그런 네가 정말 좋아. 아이 럽 유 쏘 머취!”
그래, 유난히 뿜뿜하는 내 흥이 죄다. 여하튼 호응이 좋은 나는 방청객 아르바이트처럼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 그런데 내가 이 일을 택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방송작가, 난 방송작가 꿈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10년 동안 이 꿈을 놓은 적이 없다. 엄마랑 아빠는 제발 좀 개그우먼이 되어 달라고 하셨지만, 난 대놓고 웃기는 거 진짜 못 한다. 쉽게 말해 멍석 깔아주면 숨고 싶다.
내가 부모님 앞에서 늘 재롱 부리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잘하는 줄 착각하신다. 환장하겠다. ^^;; 무엇보다 내가 똘끼가 좀 있으나, 정말 친하지 않으면 이 똘끼도 숨어버린다. 쉽게 말해, 많이 친하거나, 덜 친해도 나와 비슷한 코드를 가진 사람 앞이거나...
방송작가의 꿈을 키우니,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 언니들의 모습이 궁금했다. 학연 지연을 동원해도 일터를 구경시켜 줄 이는 없고... 오호라! 그래서 내가 택한 건, 방청객이었다. 역시 나의 예상은 맞. 았. 다.
매일 아침 8시? (시간은 기억 안 남) 2호선 당산역 1번 출구 앞 맥도널드에서 나를 태울 차를 기다렸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각자 mp3 듣기에 바빴을 뿐. 나도 보아의 ‘No.1’을 듣느라 옆에 누가 서 있는지 무관심이었으니. 45인승 관광차가 오면 우린 마치 짠 듯이 질서를 지키며 차에 올랐다. 목적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뭐, 여의도 아니면 탄현 혹은 일산일 테니까.
자자, 이제부터 기약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녹화가 들어가기 전, 우리는 한없이, 원 없이 기다려야 한다. 녹화가 시작되면? 역시나 시간과의 사투다. 금방 끝나는 건 2시간 이내에도 마무리되지만, 길면 4시간 5시간까지 간다. (그래, 아주 지구 끝까지 기다려 보자!)
“녹화 시간이 길면 좀 어때, 그만큼 페이를 많이 주겠지!”라고 생각하는가? 아이고, 길에서 만 원 줍는 소리 하지 마시라! 지금은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한 프로그램 당 얼마의 페이를 받았다. 녹화 시간이 길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에 녹초가 되어, 배고픔에 허기진 배는 각자의 몫일뿐) 녹화가 시작되면 다른 방청객들은 연예인을 보느라 초롱초롱, 나는 대사를 쓴 종이를 들고 있는 작가 언니들을 보느라 초롱초롱!
“자, 무조건 호응은 크게! 알죠? 그래야 NG 없이 갑니다!”
나의 호응이 빛을 바랄 때다.
(손바닥에 핏대 세우며 박수) “와!!!”
상황에 따라 기쁨과 슬픔, 놀라움, 아쉬움을 만들어내느라 목이 쉬는 줄도 모른다. 어느 날, 나의 이 투철한 정신이 방청객 담당 언니의 눈에 제대로 꽂혔다. “지니 씨, 호응을 참 잘하는데, 계속 와 줄 수 있어요?”
어머나! 내게도 이런 칭찬을 들을 날이 오는구나...
“네! 매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억지로 웃느라 편두통이 자주 생겼다. 그런 적 있나? 일부러 웃느라 힘들었던 적... 그렇게 호응을 잘하는 나인데, 역시나 억지로 하면 병 된다. 나란 사람은 억지로 못 한다. 일부러 그런 척을 못 한다. 그러니 “너 되게 좋아한다?” “뭐가 그리 좋아?” 등의 말 좀 하지 마세요... 난 진짜 좋아서, 웃겨서, 놀라서, 대단해서 그러는 거니까.
이 일을 경험한 뒤로, TV 속 방청객을 쉽게 보지 않는다. 웃겨서 웃고, 놀라워서 놀랄 수 있지만 그것도 업으로 하면 결코 만만한 게 아니기에... 여하튼 녹화가 끝나면 대다수의 방청객은 연예인에게 달려간다. 사인을 받기 위해서다. 사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으랴. 그럼, 나는? 방송작가를 꿈꾸는 이지니는? 난 뒤를 돌아 작가 언니들에게 돌진한다! 그리고 아주 착하게, 얌전하게, 다소곳하게 묻는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방송작가를 꿈꾸는 대학생입니다. 오늘 방송 정말 재밌었어요! 그런데... 혹시 가지고 계신 큐카드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매일 보고 있으면 꿈에 한 발 더 다가가는 듯할 것 같아서요. 헤헤”
“어머, 그래요? 보통 연예인들 사인받느라 정신없는데, 큐카드 달라고 한 사람은 처음이네요. 므흣”
“아, 헤헤...” (나 같은 애 나도 첨 봐, 그러니까 빨리 큐카드! 커몬!)
그렇게 해서 나는 몇 군데의 큐카드를 소장하며 꿈과 더욱 가까워졌다. 페이를 보고 했다면 이 일은 절대 못 한다. 최저 시급은커녕 차비 빼고 허기진 배를 달랠 정도의 간식을 사면 마이너스니까. 호기심 때문이라면 한두 번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난, 꿈과 연관이 있기에 여러 번 해도 견딜 수 있었다. 실제로 방송작가가 된 후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여한(?) 없다. (큐카드 작성법, 방송 구성 작성법 등)
아, 생방송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SBS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프로그램이다. 시작 1초 전까지 진장을 늦출 수 없고, 방송 중에도 침 한 번 크게 삼키는 것이 조심스러웠던. 정말 추억 돋는다. 아, 옛날이여!
짧은 에피소드를 담자면, 가수 성시경의 데뷔 초를 기억한다. 당시 SBS <좋은 친구들>이란 프로그램(아, 옛날 사람 -_-)에 나왔는데 나도 거기 방청객으로 있었다. VCR이 나갈 때, 앞 줄에 앉은 방청객들과 몇 마디 나누기도 했다. 물론 성시경 님은 나 따위 기억조차 못 할 테지만 (인생이 뭐 그런 거 아니겠...) 말이다.
배우면 배우, 개그맨이면 개그면, 가수면 가수. 정말 많은 연예인을 실제로 봤는데, 그중 가장 기억나는 연예인은 지금은 배우로 활동하는 장나라 님이다. 인형이 살아서 움직이는 걸 눈으로 목격한 기억. 여하튼 방청객의 추억은 아련하다.
다시 할 생각이 있느냐고?
만약 내가 여의도 근처에 살면, KBS1 <아침마당> 생방송은 참여하고 싶다. 이젠 그럴 나이(까진 아닌가? ㅎㅎ;;) 아침마당은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려줘서 책 같은 TV라고 자부하기에 기회가 닿으면 꼭 방청객으로... 아니, 출연자로 서고 싶다. (그날이, 올까요? 정말요?) 꿈이 소중했기에, 돈이 되든 안 되든 연관된 일 또한 내게는 소중했다. 지난 일을 회상하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럼, 지니의 방청객 경험담을 마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