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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니 Apr 07. 2020

개그우먼이 될 뻔했는데 말이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순 없는 일

KBS 20기 공채 개그맨 지원 경험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순 없는 일>



어릴 , 유난히 연예인 흉내를 곧잘 내던 아이. 동네 아주머니들을 한데 모셔두고 마치 말발이 죽여주는 약장사처럼 상대의 혼을 뽑으며 말하던 아이가 나였다. 학창 시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깊어지는 재롱(부모님 앞에서) 친한 친구들을 학교 옥상으로 데려가 미니 공연을 선보였다.


하지만,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반에서 굉장히 조용한 아이였다. 매 학년의 담임 선생님 중 나를 기억하는 이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 난 그저 엄마 말처럼 '안방에서 호랑이 잡는' 즉, 아는 사람만 아는 개그우먼이었던 거다. 이런 내가 대학교 졸업 직전, 교수님의 진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도 다른 학교 교수님께.


“지니야, 너 내년에 하는 개그맨 시험에 응시할 생각은 없니? 네가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건 알겠다만, 개그우먼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이 분은 당시 방송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코미디 작가였다. 심지어 내가 지원한 KBS 공채 개그맨 시험의 면접관이기도 했다.


모르겠다... 내 안에 잠재된 진짜 속마음이 드러난 건지는... 부모님이 그렇게 소원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귓등으로 흘리더니, 검증된(?) 분의 한마디에 “지원하겠습니다.”라고 답한 걸 보면.


그렇게 해서 20기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1차 서류 심사는 통과! 2차부터 실기다! 후들후들... 솔직히 한방에 붙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다. 교수님이 면접관 자리에 앉으실 거란 걸 알았지만, 나의 합격 여부와 그분은 별개니까. (역시나 공정한 공영 방송!) 무엇보다 지원자 중 대부분이 대학로에서 몇 년 동안 밥 먹듯이 개그 연습을 하고, 공연하는 사람들이다. 인생을 다 건 그들과 겨우 한두 달 연습해 가는 내가 상대가 되나?


이런 상황을 잘 알면서도 교수님께 하겠다고 답한 건,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도 오래전부터 원하셨고, 친한 지인들도 권유했으며, 나 또한 도전하고 싶었다. 떨어지더라도 유쾌한 모험을 느끼고 싶었다. 교수님의 한마디가 타이밍이라 여긴 거다.


일단 당연히(?) 불합격될  알았기에, 아빠한테는 비밀로 했다. (낮에도 연습해야 했기에 엄마한테만 알렸다) 대본을 쓰고, 대사를 외우며, 연기하기를 반복했다. 하면 할수록  개그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니 펭귄도 울고  만큼 썰렁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유행한 '병팔이의 일기'  스타일로 바꿔서  개그였다)


시험 당일, 여의도까지 가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생애 첫 ‘청심환’은 이때 먹은 거다. 대기실에 도착해 심장을 달랬다. 하지만 수많은 지원자와 함께 있으니 더 긴장됐다. 지원자들은 남 신경은 1도 쓰지 않은 채 각자 준비한 개그를 연습하고 있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았는데, 내 옆에 일란성 쌍둥이가 서커스 비슷한 느낌으로 준비해서 심히 놀랐고 당황했다. 맞다, 그들은 개그맨 이상호, 이상민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혼자 중얼대던 덩치 큰 남자, 지금의 유민상이다. 20기 합격자를 보니 쟁쟁하다.


유민상, 신봉선, 박휘순, 정경미, 김재욱, 쌍둥이 개그맨 등.


“자, 이제 호명하는 열 분은 미리 준비해주세요.”


열 명씩(내 기억으론) 면접실에 들어간다. 나란히 자리에 앉은 나는 앞에서 개그 하는 지원자들의 연기를 눈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알 수 없는 무엇처럼, 곧 닥칠 나의 차례 때문에 뵈는 게 없었다. 이때 들리는 우렁찬 남자 목소리!


“다음은 752번 이지니 씨입니다.”


개그맨 유세윤이다. 바로 앞 기수인 그가 지원자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고 있었다. KBS2 <개그 콘서트>에서 복학생으로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그가 내 앞에 있다니,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신기했다.


면접이 끝났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슬프게도(?) 떨어졌다. 물론 떨어져야 맞다. 연습 때보다  떨어서 가뜩이나 썰렁한 개그를  재미없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막판에는 너무 재미없어서 조차 민망하더라. 결국 막춤으로 심사위원들의 치아를 내보였다. 끝날 무렵 잠깐이나마 웃겨드려 다행이라 여긴다.


교수님, 죄송해요... 너무 못했죠?

보는 내가  민망하더라, 하하. 막판엔  웃기던데, 처음부터 그렇게 밀지 그랬어?”



위로가, 달다 +_+



내게 개그맨 지원 경험은 여전히 특별하다. 새로운 모임에서 자기소개할 때면, 종종  이야기를 꺼낸다. 그럼 다들 뭐라고? 네가?!”라는 표정이다.  안의 똘끼를 미리 느끼라는 차원에서 밝히는 거라고 해두겠다. 결과에 상관 없이 나의 수많은 도전  가장 자랑스러우니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기에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다.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개그맨을 볼 때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 싶다. 작정해서 웃기려는 건, 내 앞에 대본이 있다고 해도 쉽지 않으니까. 특히 KBS 공채 20기 출신이 나오면, 그때의 내가 소환된다. “당신과 동기가 될 뻔했는데 말이야.”라며 콧방귀를 휘저으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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