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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니 Apr 08. 2020

중국어보다 화장품 지식이 더 무서웠소

이지니의 <닥치는 대로 경험했어요>

인천 국제공항 면세점 화장품 판매 경험담

_ 중국어보다 화장품이 더 무서웠소



'월량대표아적심'의 노래가 흐르는 영화 <첨밀밀>기억하나요? 나는 영화속 이 노래를 듣고 영국 어학연수를 포기하고 중국으로 방향을 바꾼다.



2005년 가을, 중국어를 배우려 내 생애 첫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정확히 9개월 고국으로 돌아온다. 중국어 초급상에 해당하는 자격증 '구HSK5급'을 손에 쥐고서. 집에서 놀고 먹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엄마 때문에 나는 시차 적응(응? 한 시간인데)도 못한 채로 구인구직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이 가면 꼭 하고픈 일이 있었다. 항공사 지상직 근무다. 일단 승무원 유니폼이 예쁘다. 역시 나는 겉모습에 잘도 반한다. 하지만 토익 점수가 필수라서 포기했다. 외국어 공부는 중국어 하나로 족하다 여겼던 나다.



여하튼 여행을 좋아하는 내 눈에 들어온 건 인천 국제공항 면세점! 물론 공항에서 일하는 것뿐 외국을 나갈 리 없지만, 늘 그렇듯 그 순간은 마치 뭐에 홀린 듯 이끌린다. 그리하여 나는 롯데 면세점 모 화장품 브랜드 직원 채용에 지원서를 낸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현지인들이 중국어를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정말 잘하는 줄 착각하며, 그렇게 어깨뽕을 한껏 세운 채로!



며칠 후, 안 받으면 큰일날 것 같은 울림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여보세요.”

“아, 이지니 씨 되십니까? 롯데 면세점 채용 건으로 전화드렸는데, 혹시 면접 가능한가요?”



오마.... 올 것이 왔다.



면접 당일, 나는 있는 옷 없는 옷 다 끄집어내어 최대한 촌스럽지 않게, 나답지 않은 깔끔함으로 길을 나선다. 으리으리한 본사가 눈앞에 보이자, 얌전하던 심장이 나대기 시작한다. (제발, 쫌!)

 


중국어 가능자로 지원했기에 한국어는 기본이고 중국어로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아, 나는 무엇 때문에 이리도 실전에 약한 것인가... 중국인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는 틀리든 말든 자신감 있게 말하면서, 왜왜왜!' 그러나 감사하게도 간절한 나의 눈망울을 외면하지 못한 채용 담당자는 결국 나를 합격시킨다. 인턴 3개월 후 정규직 전환이.



첫날의 출근 시간은 오전 7시 반이다. 당시에는 인천대교가 완공 전이었다. 즉, 새벽 6시에 주안역 앞으로 오는 통근 버스를 타야 한다. 그 말은 또, 집에서 새벽 5시 30분 전에는 나와야 한다. 스케줄 근무라 새벽행이 한 달에 반 정도는 있다. 차 안에서 아직 덜 깬 잠을 청한다. 아니, 잠이 안 온다. 첫 출근이라 떨린다.



공항에 도착해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머리는 위로 올려 망으로 감싸고, 신발은 엄마가 취업 축하 기념으로 사주신 '무크' 검은색 구두를 신는다. 스타킹은 구멍 나진 않았는지 뒤태 또한 점검한다. 그리고 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검색대를 통과한다.  검색대가 뭐라고 통과할 때마다 우쭐해진다.



우와, 여행할 때 가장 설렘을 주는 장소에 도착! 기쁨도 잠시,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직원 서너 명이 곧 들이닥칠 사태에 준비한다. 산대 체크와 제품 및 진열대를 닦고 있을 때쯤, 손님이 몰려온다. 말로만 듣던 큰손 중국인들이!



우르르르르르~~~



(중국어로)


“이 종이 좀 봐요. 우리 딸이 이걸 사 오라고 했는데 뭔지 모르겠어요.”

“언니, 제 피부톤이 어두운데 어떤 걸로 쓰면 될까요?”

“최대한 얼마까지 살 수 있어요?”



그래, 이런 질문은 중국어를 배운 나로서 응대할 수 있다. 하지만... (다짜고짜 휴대폰을 건네주는 중국인 아저씨) “전화 좀 받아줘요, 뭘 사 오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당황한 ) “... 여보세요? 어떤 게 필요하세요?"



아뿔싸! 상대는 사투리가 끝내주는 아주머니 아닌가! 표준어로 구사해달라고 해도 진짜 못 알아듣겠다. 으앙, 울고 싶다. 그때는 스마트폰용 메신저가 없었으니... 다행히 배불뚝이 착한 아저씨가 “아, 미안해요. 우리 마누라 사투리가 심하죠? 그냥 이거랑 저거 주세요.”라며 내게 병 주고 약주신다. 므흣.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다!



손님이 많다는 건 매출로도 영향이 있으니 좋은 일이다. 그래, 좋다 좋아. 하지만 문제는... 실은 내가 화장품에 문외한이다. BB크림은 그나마 20대 초부터 시작했지만, 마스카라를 처음 사용한 건 20대 후반에 잠깐이었고, 디테일을 하는 제품은 그야말로 듣.보.잡.이다. 입사할 때 미리 제품 자료를 받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고객을 응대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제 피부가 건조한데 이 제품을 써도 괜찮요?”

“다크서클이 심해서요, 컨실러 좀 추천해주세요.”

“50대 엄마한테 드릴 건데, 립스틱 어떤 색이 좋아요?”

“피부 타입이 지성이면 클렌징은 어떤 게 나아요?”



물론 어떤 품목이든 그것을 판매한다고 해서 모든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는 어렵다. 전부 써 봤을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끄는... 유연함? 융통성? 이런 게 당시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마음이 꽃처럼 여리여리했던 나라서 (ㅎㅎ) 정직하게도 잘 아는 것만 답했다. 답변을 모르는 질문에는 눈웃음과 베테랑 직원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릴 뿐이었다.



등줄기에 맺힌 땀이 르기도 전, 점심시간이 됐다. 공항에서의 점심은 어떨까? 오전의 긴장을 잊은 채, 선배들이 가는 맛집을 함께 따랐다. 공항 안에 있는 음식점은 거의 다 비싸다. 10년이 훌쩍 넘은 그때에도 웬만한 한 끼가 최소 9천 원 혹은 1만 원이다. 다행히 식비는 회사가 부담하니, 나는 그저 감사히 먹을 수 있었다. 꿀같은 시간이 지나고 오후 근무가 시작됐다. 퇴근하는 4시까지 잘 버텨야 한다.



“지니 씨, 중간 재고 확인 좀 해줄래요?”



'그래, 고객을 응대하느니 물건 개수 세는 게 낫겠다. 그래, 이게 낫겠다. 아싸! 다행이다.'



한 손엔 차트를 들고 고객 사이를 지나며 재고를 확인한다. 이게 훨씬 쉬운 줄 알았다. 와,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개수를 세고, 안 맞으면 다시 처음부터 확인하고, 부족한 제품은 따로 정리해서 적어야 하며, 그 와중에 판매가 되면 또다시 확인해야 한다.



재고의 세계에서 허덕일 때쯤 여행용 가방과 여권을 들고 매장을 찾는 여행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사무치게 부럽다. 나도 여행객이었는데... 면세점 직원들은 편하게 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역시 나는 겉 판단을 참 잘하는구나.' (웃픔이구나)



퇴근 2시간 전, 계산대 안에 있는 원화, 달러, 위안화, 엔화, 유로 등을 들고 돈 좀 바꿔오란다. 길을 나서기 전, 어떤 돈 얼마를 어떤 돈 얼마로 바꿀지 미리 계산해서 가야 한다. 그래야 일처리가 빠르기 때문이다. '아, 숫자에 약한데...' 정말 끝까지 난관이다. 나름대로 미리 정해 놓고 갔더니, 담당 직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제대로 안 했네요? 이렇게 오면 안 돼요!”



‘같은 직원인데 까칠하네 이 여자...’



면세점의 겉모습에 제대로 속은 하루. 그러나 하루 해보고 내 일이 아니라고 그만둘 수는 없다. 최소한 3개월은 해야지 않나. 그 사이에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석 달을 채웠지만 역시나 내 일이 아닌 듯하여 그 자릴 나왔다. 이왕에 하는 거 매장의 '매니저'까지 되고 단 생각도 잠시 가졌지만, 그러기엔 나의 열정이, 관심이 제로에 가까웠다.



친한 지인이 일을 재밌게 하길래 내게도 잘 맞을 줄 알았다. 그녀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면세점에서 즐거이 일하고 있다. 수입도 괜찮고, 일도 익숙해져서 이렇게 편한 일세상에 없단다. 이 역시 베테랑만이 할 수 있는 말일 테.



때 되면 직원들에게 화장품을 준다. 특히 신상품은 무조건 준다. 이 유혹에도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첫 술에 배부르기를 바랐던 나. 역시나 첫 술에 제대로 넘어진 나다.



'어떤 일'을 하기 전까지의 열정은 그 누구도 못 꺾는다. 기필코 해내야 한다. But 나의 뜨거움이 그 일과 제대로 직면하는 순간, 비 맞은 강아지처럼 깨갱이다.



생각할수록 웃음이 흐른다. 겁도 없이 덤빈 나의 20대. 어떻게 보면 안쓰럽고, 또 어떻게 보면 귀엽다. 서른 중반이 훌쩍 넘은 지금, 다행히(?) 진짜 내 길을 찾았기에 더는 막무가내를 발휘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필요한 막무가내는 여전히 존재한다. 내 열정의 온기가 재빨리 식는다고 해도 도전하고 경험할 것이다. 모든 건 나의 자산이 되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글감이 되어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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