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몇 주전 시어머니께서 이제 막 뜨개질을 시작한 가방을 보여 주신 적이 있었다.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여유가 없으셨을 텐데 어느새 완성을 하셨구나.
평생을 전업주부로 사신 시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시다. 요리는 기본이다. 밑반찬은 말할 것 없거니와 김치는 종류별로 담그신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오이김치, 무김치 등 등. 우리 집에는 김치가 떨어질 틈이 없다. 도토리가루를 직접 갈아내어 도토리묵도 쑤어 주신다. 몸에도 좋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끝내준다. 춘장으로 짜장 소스를 만들어 둘째가 좋아하는 짜장면도 종종 해주신다. 신랑이 어릴 때는 집에서 카스테라와 빵을 직접 구워 주셨다고 한다. 한식, 중식, 양식을 섭렵한 요리 고수이시다.
시어머니의 집밥, 직접 쑤신 도토리묵
시어머니는 뜨개질도 잘하신다. 작은 물병을 쏙 담을 수 있는 파란색 보조 가방부터 이렇게 큰 가방도 뜨개질로 뚝딱 만들어 내신다. 귀여운 모자도 떠서 손주들한테 씌어보는 게 낙이시다.
시어머니가 뜨개질하여 만드신 가방
미싱도 잘 돌리신다. 아이들 어릴 때 옷도 몇 벌 만들어 주셨다. 디자인은 내 취향이 아니라 자주 입히지는 않았지만(죄송해요 어머니..) 솜씨가 정말 좋으시다. 커튼도 만드시고, 본인 옷도 수선해서 입으신다.
딸아이와 시댁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이번에 만드신 가방을 두고 이야기가 오간다.
"어머니, 어쩜 이렇게 가방을 잘 만드셨어요? 팔 아프셨을 텐데.."
"아이고. 그래 이번에는 실이 두꺼워서 그런지 팔이 좀 아팠지 뭐니"
"가방끈도 직접 다신 거예요?"
"가방끈이랑 안감은 동대문 시장 가서 했지. 우와~ 거기 가보니까, 실이랑 가방끈 파는 곳이 엄청 많더라고" "가방끈 달아 주는 데는 따로 있는 거 같은데, 나한테는 안 알려 주더라고." "가방끈 만 원, 안감 넣는데 만 원 해서 2만 원을 받지 뭐니" "참. 가방끈은 때가 타니까 갈색으로 했지." "가보니까, 뜨개질을 배우려고 온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고. 아버지 몸 괜찮아지시면 나도 거기 가서 좀 배워봐야겠다."
나는 딱 두 마디 질문을 드렸는데 어머니는 역시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신다.
고백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씀이 많은 시어머니가 부담스러웠다.
대화의 주제가 생소하기도 하거니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말들. 처음엔 집중해서 듣다가도 점점 내 몸이 꼬이고 영혼 없는 추임새만 간신히 내뱉는다. 남편의 과묵한 성격이 답답할 때가 있었는데 대조적으로 말이 많은 시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맞나 생각하기도 했다.
보통의 며느리들이 잘 이해 못하는 시어머니의 행동 몇 가지가 더 있긴 하지만
싸면 무조건 많이 사서 쟁여 놓는다.(그런데 잘 쓰지 않음, 20년 넘게 보관하던 양말 꾸러미도 발견) 냉동실에 뭐가 있는지 꽉꽉 차서 더 이상 넣을 수가 없다.(집에 냉장고가 3개) 음식이 조금 남아도 절대 버리지 않는다.(결국은 썩어서 버리는.)
제일 어려운 건말을 들어 드리는 것이었다. 여우 같은 성격이 못 되는 곰 같은 며느리라 시어머니 말씀에 장단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인데도 이상하게도 시어머니 이야기는 오래 듣고 있기힘들었다.
수영장 같이 다니는 어떤 할머니의 며느리 이야기, TV 뉴스 소식에 ○○당이 미친 거 같다는 거며, 요즘 양파가 너무 싸서 2자루 사서 장아찌를 담가야겠다는 이야기 등등
끊어야 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노라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시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현진이는 참 말이 없어요.
이렇게 말 많은 시어머니를 조금씩이해하기 시작한 건 둘째를 키우면서였다.
우리둘째는 쉬지 않고 재잘재잘대는 아이이다. 남자아인데도 첫째 딸보다 말이 많고 살갑다.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그날 학교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학교에서 누가 신발을 아래층으로 던져서 선생님이 CCTV로 확인하느라 8시에 퇴근하셨다는 이야기
같은 반 여자 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아이 이름을 초성으로 이야 했는데 'ㅇㅇㅈ'이라서 아무래도 자기 같다는 이야기 생존 수영 강습 마지막 날 선생님이 음료수를 주셨는데, 마지막 남은 음료수를 수영 제일 잘하는 아이에게 주기로 했는데 바로 자기가 마셨다는 이야기
"연재야, 이제 그만 얘기하고 우리 책 읽을까?"
간신히 제지를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이야기할 아이이다.
둘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고, 그 당시 상황이 연상돼서 웃음이 빵 터진 적이 많다. 우리 집이 조용한 날은 둘째가 집에 없거나 아프거나 할 때다.
둘째는 호기심도 많다. 클로버가 모여 있는 잔디밭을 발견하면 항상 네 잎 클로버를 찾느라 정신없다. 아빠랑 야구 중계를 볼 때면 쉴 새 없이 물어본다. 누나랑 엄마랑 대화할 때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꼬치꼬치 물어서 다 이해해야 직성이 풀린다.
남편과 이런 둘째가 과연 누굴 닮았는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서로 안 닮았다면서
이제는 안다. 우리 둘째는 시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70이 넘으신 시어머니는 지금도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어머님이 조용하신 날은 아버님이나 시누이하고 싸웠거나 몸이 안 좋으신 날이다.
재잘대는 둘째 이야기를 들으면서,아이의그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시어머님의 마음이 떠올랐다. 내 눈에 둘째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처럼 '누군가의 딸이었을 때는 얼마나 사랑을 받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킹맘 며느리 일한다고 아이들 봐주시고 음식 챙겨주시고 책도 읽어 주셨는데, '나는그 몇 마디 들어 드리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귀찮다고만 생각했을까' 워킹맘 생활 10년이 넘어 이제야 철이 드는 며느리다. 애를 낳고 키워봐야 어른이 된다는데 이제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