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을 필사하는 모임에서 어느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분의 컬럼을 접하게 되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 들었던 때가 있어서 더 재미있게 <부럽지가 않아서 문제>라는 제목의 컬럼을 읽었다.
정대건 컬럼니스트는 “‘부러움과 자랑의 세계'에서 비교적 초연한 것 같고”라는 문장을 사용하며 남들한테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자족적인 취미를 언급했다.
초연은 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다는 뜻이다. 나도 요즘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예전의 내 기억 저편에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아이들을 태우고 지나갔다.
모두 그럴 테지만 나는 예의가 바른 운전자를 좋아한다. 아무리 크고 좋은 차를 탔어도 끼어들기를 막무가내로 하려 할 때는 싫다. 깜박이를 여러 번 켜고 비상등을 켜서 들어오겠다는 시그널(신호)을 충분히 하고 들어올 때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양보해준다.
한 번은 큰 외제차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원래 아는 사람처럼 시그널(신호)이 전혀 없이 들어온 그 차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별일 없이 지나 칠 줄 알았는데 그 후가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대며 창문을 활짝 열고 손가락질을 한참을 하던 그 30대 후반에서 40대로 보이던 남자들.
아이들이 조금 걱정이 되어 백미러를 보는데 큰 아이는 오들오들 떨며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고, 막내는 그 아저씨들의 사납던 소리가 무서운지 두 귀를 고사리 마냥 작은 양손으로 꼭 틀어막고 있었다.
저들은 어떻게, 어떤 돈으로 저 차를 탈까?
갑자기 이 단어가 생각났다.
'졸부'.
초등학교 때 친구 오빠의 준비물을 챙겨서 걷던 대치동과 도곡동 거리는 학원가가 아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아파트와 집이 있던 여느 거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교육 학원이 즐비해져서 그 동네 1억짜리 아파트가 아줌마들의 담합으로 수십억 대가 된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내 어머니는 왜 그 아파트를 사지 않았냐고 묻는 내게 "거기 쥐 나와. 쥐"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낙후된 동네라는 뜻일 거 같다. 하지만 ‘설마 쥐는 나오지 않았겠지.’
컬럼 < 부럽지가 않아서 문제>에서 정대건 컬럼니스트는 이런 말을 나눴다.
"남들이 좋다는 것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족적인 취미가 있어서였다. 극장에 가고 도서관에 가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진다면?"
회계 수업(Accounting)에서 처음 접한 매슬로우 욕구 5단계(Maslow hierarchy)를 한참 바라보며 ‘진짜 와!’를 연발했던 그 기억이 있다. 매슬로우의 최하위 단계는 생리적 욕구(biological and physiological needs)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산소, 음식, 수면, 의복, 주거 등의 삶 그 자체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기본 욕구를 포함한다.
오랜만에 그 미용실을 찾았다. 원장님은 남자분이신데 점잖지만 세련된 분이시다.
머리 스타일도 세련되었지만 2015년 내가 다녔던 그때의 인테리어도 상당히 인상 깊다. 꼭 요즘 카페 인테리어와 비슷했다.
나에게 대뜸 원장님은 이렇게 물어보셨다.
너무 오랜만이신 거 같은데 기록을 찾아보니 2015년에 오셨어요~
나는 대뜸 막내가 초등학교 때 염색을 하고 싶다 해서 염색을 해줬던 그 기억을 되돌려 이야기했다. 대뜸 내 근황을 물어보셨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고 돌아왔어요. 경기도에 살았었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경력이 단절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하며 겸연쩍하여 허허 웃고 말았다. "저보다 한 기수 빠른 선배도 교수가 되었고 많은 분들이 지금도 일선에서 일하시고 그래요~"라고도 말했다.
내 말을 듣고 대뜸 그 원장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제가 아내와 어느 미술관의 전시회를 갔어요. (사실 언급해주신 그 작가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작가님 작품을 보고 저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거든요? 아마 이분, 이런 대작을 만든 거 보면 결혼을 안 한 미혼이다~ 미혼' 이라구요" 라며 나에게 "아이들을 키우신 게 더 멋진 작품이 아닐까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그때 바쁘게 열심히 살았는데 아이들 키우고 지금도 이 자리예요. 그래서 요즘 도서관을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에 가닿은 이런 말도 했다. “제가 살 세상보다 아이들이 살 세상이 더 녹록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기대하기 어렵고 미안해서 제가 뭐라도 다시 해보려 사부작 거리고 있어요”라는 말도 함께 했다.
나에게 뭘 전공하셨냐고 물어보시는데 그 전공은 말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말로 돌렸다.
'나는 왜 그랬을까?' 이 부분은 면밀히 나를 한번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장님은 나에게 요즘 주변에 있는 이야기들을 주저 없이 해주셨다.
'하우스 푸어에 관한 이야기', '요즘 청년들이 둘이 편이 갈려서 금방 헤어진다는 이야기', '대학 이름으로 서열이 나뉜다는 이야기', 그리고 '미국 맨해튼에 좋은 동네에서 좋은 분들 사이에서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산이 어우러진 서울과 다소 먼 곳에서 살고 싶지만 고민하던 사이에 또 집값이 올라버린 이야기'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나는 유럽도 가고 싶고 멀리 가서 하고 싶은 거 해보고 싶지만 아이들이 있어서요... 우리 아이들을 제가 못했던 거 해줘야죠”라는 그 말.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쓰리고 나와도 교체되는 부분이 있어서 애잔한 마음마저 들었다.
우리나라는 전쟁 이후 격변기를 보내고 이제 G20에 들어갔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분들을 보면 자녀들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과 전 재산과 그 삶을 송두리채 내놓은 그 엄청난 희생을 접하게 된다.
이건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내가 본 독립투사들, 독립군들을 보면 양복을 입고 있었고 학식이 풍부했다. 하지만 나라 잃은 슬픔이 그분들의 일생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건지 그분들의 자녀들까지 일본군에 쫓겨 공부를 제때 하지 못하고 도망을 다니고 또 도망을 다녔다. 이런 역사를 알게 된 어느 순간부터, 최소한 의식주 이런 걸 자랑하는 사람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변하고 있다. 내 인생 모토가 우아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게 늙어가는 것인데 좌우로 갈대처럼 마음이 펄럭였지만 이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내 모습이 여간 만족스럽다.
정대건 컬럼니스트가 말했듯 나도 그 노래를 접하고 잠들기 전까지 듣고 잤으니 이렇게 멀리서도 결이 같은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변화된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