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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Jan 17. 2021

어느 멋진 일요일(4)

피오나의 단편소설

"그런데 쭉 멜번에 있었던 거야?"


나는 서진의 근황이 궁금했다.


"응...그런 셈이지. 어학연수 끝나고 한국학교 복학 안하고 모나시 대학 진학했고, 지금 대학원 마지막 학기야."


그랬구나...

그때 서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함께 멜번에 있자고...만약 그랬다면 나도 지금까지 멜번에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나를 찾았어?"

나는 서진의 학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의 사람찾기에서 나이와 이름 학교로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

그러나 서진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메일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며칠을 서진의 꿈을 꾸며 그리움이 가라앉지 않아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네 메일 받고 놀랐어. 답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됐는데 마침 내가 한국에 올 일이 있어서...보고 싶더라고...널 만나기 전에는 결혼한 여자를 만나도 되는가 싶었는데...막상 만난다고 생각하니 옛날 기억이 많이 나더라고"

옛사랑을 만난다는 것은 누구나 고민되는 일이리라...

그러면서도 우연히라도 한번 마주치기를 애타게 기대하기도 한다.


"한국에는 무슨 일로?"

"응. 세미나 때문에 일주일 정도 있을 예정이야."


어쩐지 이 얘기는 멜번에 있을 때 서진에게 일주일 후에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일주일을 함께 보낼 수도 없었다.


나는 시내로 나와 적당해 보이는 한식집에 주차를 시키고 차에서 내리다 갑자기 느껴진 한기에 멜번이 지금 여름일 거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물었다.


"멜번은 지금 따뜻하지?"

우리 나라와 계절이 반대인 곳...그 곳에서 나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었는데...서진과 함께...


"가장 따뜻할 때지...."

"부러워...늘 크리스마스가 따뜻해서..."


5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는 함께 월리엄스톤에 갔었다.

서진과 처음 만난 후 누나 동생으로 지내다가 우리가 연인임을 인정하게 만든 짧은 여행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기차를 탔던 여행....

월리엄스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뜬 멜번 시내와는 전혀 다르게 조용했다.

마치 크리스마스가 이미 지나가버린 것처럼....


월리엄스톤은 동화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모든 것이 아담하고 걸어서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도록 아늑한 곳이었다.

우리는 무작정 걸어가다 바닷가를 발견했다.
인적드문 거리와 다르게 바닷가는 오랜 만에 휴일을 맞아 가족끼리 놀러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베낭에서 큰 타월을 꺼내 깔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앉았다.
서진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누워서 일광욕을 하기 위해 수영복 윗쪽을 벗고 가슴을 드러내는 여자들을 흘낏거렸다.
 

"볼려면 당당하게 봐."
 

나는 그런 서진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한마디 했다.
 

"내가 신기한 건 수영복을 벗는 여자들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야. 아무도 여자의 가슴을 기웃거리는 남자가 없어."
 

나는 서진이 단순히 여자들의 가슴을 구경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결국 문화의 차이인가? 여기서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게 하고 또 바닷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그런가 보지 뭐."
 

서진의 말에 대꾸하며 나도 가슴을 다 드러내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같은 여자로서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당당하게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이곳 여자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곳에 오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 얽매여 있었는지 느껴져."
 

서진은 내 어깨와 등에 오일을 발라주며 말했다.
 

"난 한 번도 여자들이 해변에서 가슴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해봤거든."

나는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만들며 놀고 있는 금발머리의 어린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
 

나는 서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가지 제약 조건 때문에 어떤 표현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 또 서진은 나보다 네 살이 어리다는 것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라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약혼자에게 결별 선언을 하고 서진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나는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부탁이야. 여기에서만이라도 내 애인이 되어줄래?"


서진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서진은 나에게 자기를 선택해달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영원히 자기를 좋아해달라는 말보다 나에겐 더 애절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서진은 나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서진은 처음으로 나에게 키스를 했다.

월리엄스톤의 바닷가에서는 어떤 연인이 키스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관심있게 쳐다보지 않았다.

이렇게 거리에서 애정 표현이 자유로운 곳...이곳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여기서 하루 묵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루만에 멜번 시내로 돌아오자는 계획을 무시하고 하룻밤 머물 수 있는 B&B를 찾아나섰다.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 날 만큼은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고 싶어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대도 할 수 있으리라...
우리에게 그 날은 크리마스 이브이기 전에,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처음 보내는 밤이었다.  

https://youtu.be/CFlMy48ui9s


https://brunch.co.kr/@jinnyim/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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