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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Jan 17. 2021

어느 멋진 일요일(5)

피오나의 단편소설

"요즘 어떻게 지내?"


서진은 오랜만에 제대로된 한식을 먹어 본다면서 5년 전에 내게 자주 보여줬던 감격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서진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근황을 알고 싶어서 물었겠지만 나는 요즘 그 질문이 제일 싫었다.


내 일상은 두살박이 연우로 인해 매일 정신 없이 바쁘고 힘겹지만 대외적으로는 별로 할 얘기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직업을 묻거나 직업란을 채울 때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가사노동도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매스컴에서도 떠들고 스스로도 굳게 다짐하지만

무엇보다 결혼 전에 일을 해 본 나로서는 그 시절이 그립기만 했다.


그 시절에는 내가 디자인한 상품이 매일 여러 사람의 눈에 보여졌고,

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연우를 키우는 일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연우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나의 보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와 남편을 위한 육아에 지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연우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일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해보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로 느껴질 뿐이었다.


"응. 애 키우고, 살림하고..."


"그렇구나. 그때 웬지 넌 살림만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영어도 꽤 잘했고 말야."


서진의 그 말이 날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남편과 결혼이 결정된 후에 나는 일을 그만두고 가정 주부로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리라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 때 나는 동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마지막 결론처럼


'그래서 그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인생의 후반부가 내 앞에 펼쳐지리라 기대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집안과 남편의 허락을 받고 호주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호주에서 돌아와 내가 계획했던 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주부가 되었던 것이다.


"하긴 나도 미혼 시절이 그리워..."


나는 그렇게 서진에게 속내를 드러냈다.

기혼자로서 누구나 미혼 시절의 그리움이 있기 마련이지만

결혼 후에 완전히 일상생활이 바뀌어버린 나 같은 여자들은 더욱 미혼이 그리울 것이다.


"아냐. 결혼 생활도 너한테 어울릴지도 몰라...네가 그때 만들어줬던 카레...진짜 맛있었는데..."


서진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요리를 즐겁게 한 적이 언제인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이 가끔 있는 일이라면 즐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매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순간부터 요리를 하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어느 때는 내가 평생 얼마만큼 요리를 해야 인생이 끝나갈 건지 마음 속으로 세어보기도 했다.

더구나 가정주부란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죽는 날까지 나는 살림을 해야 한다.

일요일도 없이 말이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차 한잔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내가 엄마에게 연우를 데리러 간다고 한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고,

내가 혼자 한국에 돌아와 서진을 그리워 하며 혼자 가끔 갔던 카페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서진이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첫 만남은 보태닉 가든(Botanic Garden)에서였다.

하루 종일 멜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오후가 되서야 보태닉 가든 축제가 있다는

포스터를 보고 가게 되었는데 내 상상이상으로 넓은 잔디밭에 반해서

맨발로 잔디밭에 벌러덩 누워 책을 읽고 있었을 때였다.


'한국 사람이죠?'

라는 남자 목소리에 책에서 시선을 떼고 바라 보았을 때 서진이 서 있었다.

서진의 뒤로 오후 햇살이 내리 쬐고 있어서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네. 왜요?'

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나에게 서진은 이것저것 물었고

나는 결혼을 앞두고 혼자 여행을 하는 중이라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보태닉 가든에서 처음 만났잖아."

"이런...내가 그때 말 안 했었어?"

"무슨?"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보태닉 가든이 아니야."


그럼 서진과 나는 다른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널 처음 본 곳은 시내 쪽이었는데 벼룩시장에서였어.

어떤 사람이 철사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서 팔고 있었지.

여자, 남자, 비행기, 자동차...나도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동양 여자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더라고....

그러다 그 사람이 하트를 든 여자를 너에게 건네줬어.

네가 얼마냐고 묻자 그 사람은 아니라면서 이제 곧 파장이라 선물하는 거라고...

그걸 받아든 너는 너무 기뻐하면서 여러 번 감사하다고 했지.

무언가 신기해하고 기뻐하고 그러는 모습에 너한테 반했던 거야.

그러다 말을 걸어 볼까 하는데 어느 순간 너를 놓쳐버렸는데

마침 친구들과 보태닉 가든 축제에 갔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거지..."


나는 아직도 하트를 든 여자를 갖고 있었다.

호주 여행 중에 인상적인 기념품이라서 열심히 챙겼던 것이다.

그 물건 서진과 나를 만나게 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일에 호기심을 갖고 또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표현이 많은 여자였던 것 같은데...


"그러다 보태닉 가든에서 네가 결혼을 앞두고 여행중이라는 말에 실망했지만...

그래도 여행 하는 동안에는 우리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자고 했지.

그래서 다음 날 학교 끝나고 만나자고 했었고...

결정적으로 나이를 듣고는 좋은 누나 동생으로 지내자고 했지..."


서진이 내게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서진에게 별 다른 이성의 감정은 없었지만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리고 서진의 말대로 나보다 네 살 어린 남자이니 편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진은 내게 집주인이 조그만 파티를 여는 데 같이 가자고 했었다.

여행만 하게 되면 현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니까 안내해주겠다면서...

나도 호기심이 끌리는 일이라 서진을 따라 파티에 갔었다.


생각보다 파티는 지루했다.

각자 와인잔을 들고 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는데 공통 화제를 찾기 힘든

나로서는 한국에서 왔다, 여행중이다...정도의 얘기를 하고 나면 대화가 끊겨버렸다.

파티가 끝나고 서진은 나를 숙소로 바래다 주었다.

함께 트램을 탔는데 우리 앞뒤로 커플들이 앉아 서로 진한 스킨쉽을 나누고 있었다.


"누나...난 사랑에 대한 오랜 꿈이 있어요."

"뭔데?"


나는 이제 스물 세살이 된 남자가 사랑에 대한 꿈이 무얼까 궁금해 하며 물었다.


"Fly me to the moon...이란 노래 알죠?"


그러면서 서진은 콧노래로 살짝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응. 오래된 노래지...."


"네. 여기서 영어 공부하다가 그 가사가 어느 날 완전히 들렸는데요.

그 말이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뜻이래요.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달에 데려가 달라고 해야겠다..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여자에게 내 마지막 여행을 함께 하자고 말해야겠다고..."


"마지막 여행?"


"우리가 앞으로 사오십년을 더 산다고 생각해봐요. 그 때 달나라 여행 상품이 나올 거에요.

내가 죽기 전에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달나라 여행을 가고 싶어요..."


그 때 처음으로 서진이 어리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눈앞의 사랑만 생각하는 이십대 초반이 아니라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 여행까지 생각하고 있는

서진의 모습을 보며 정말로 매력적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주 오면서 어쩌면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때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었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이제 결혼하고 누구의 아내, 어머니로 내 인생이 끝나겠지?"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었다.

결혼 후에도 내 인생은 계속되고 있었고 결혼 전에 가졌던 삶의 대한 호기심 열정도 쉽게 식지 않았다.

다만 현실에 갖혀서 표현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 뿐이었다.


"누나...다음 주에 크리스마스에요. 크리스마스 나와 함께 보내줘요."


서진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우리가 북반구에 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항상 눈 내리는 것만 꿈꾸잖아요.

하지만 편견에서 벗어나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어때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뜨거운 크리스마스요.

바닷가에서 선탠하면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여기서 가까운 월리엄스톤에 가요."


서진의 들뜬 모습을 보며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서진의 말대로 나는 어쩌면 인생의 단한번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서진이라면 나쁠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이 보이는 카페에서 서진과 우리의 첫만남,

또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해가 지는 것을 바라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한 일요일이 짧게 지나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https://youtu.be/-0zcc8CNcLc


https://brunch.co.kr/@jinnyim/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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