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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Feb 21. 2023

선물하는 기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무렵, 둘째는 막 돌을 지났다. 그 당시 나는 다섯 살 아이와 두 살 아이의 엄마였다. 돌아보면 육아를 하면서 기쁨에 젖어도 될 시기였건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둘째를 낳고 버는 돈이 0이 되었을 때, 0점짜리 인간이 된 것 같아 두려웠다. 언제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이대로 내가 소멸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알리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흔적을 남기겠다고 책을 쓰기 시작했더랬다. 글이 아무리 쌓여가도, 출판되기 전까지 어떤 흔적도 없다.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썼지만, 그건 나만 아는 일일 뿐. 그저 꾹 참고 다 써내는 수밖에, 그 원고를 들고 수십 군데 출판사에 메일을 돌리는 수밖에, 출판사와 계약하고 책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완성작을 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면, 그림은 즉각적이다. 한 장의 그림은 그 자체로 흔적이 되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을 보고 이웃들이 눌러주는 하트가, 내 등을 밀어주는 큰 응원이었다. 실낱같은 빛이라도 보고 싶었던 깜깜했던 시절, 그 관심이 큰 빛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을 재우려 누우면 보통은 내가 가장 먼저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1,2시쯤이면 깨어, 방으로 가서 조용히 불을 켰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중간에 흐름이 끊기지 않을 수 있는 새벽시간이 좋았다. 책상 한편에 스탠드를 켜고 온통 몰입해서 작은 그림 한 장을 그려내고 고개를 들면, 훌쩍 너댓 시간이 지나 동이 터 있곤 했다. 매일같이 환해진 창을 보며 뿌듯했다. 오늘도 원하는 것을 했다는 실감, 쓸려 다니지 않고 내 의지대로의 시간을 지켜냈음이 좋았다. 그리고 남들이 하루를 시작할 무렵, 나는 아이 옆에 고꾸라져 잠들곤 했다.


책을 보며 매일 따라 그리던 어느 날, 마들렌 카페를 오픈한 지인에게 그림 선물을 하고 싶었다. 마들렌 사진을 검색하고 백 장 넘는 사진을 저장했다. 그중 내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각도의 사진을 추려놓고 밤이 되길 기다렸다.

서프라이즈 선물로 건네질 이 마들렌 그림을 정말 잘 그려서 주고 싶었다. 그림을 받고 기뻐할 그분을 떠올리며, 행복을 줄 거면 가장 큰 행복을 주고 싶었다. 그릴 거면 가장 잘 그리고 싶었다. 겁이 났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이 날도, 새벽 1시쯤 눈을 떴다. 육아하면서 대충 걸친 티셔츠로 자던 그대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정갈한 몸으로,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리고 싶었다. 샤워를 했다. 중요한 것을 하기 직전의 피하고 싶은 마음, 너무 잘 하고 싶은 마음이 합쳐져 공부하기 전 책상치우는 학생처럼 몸을 씻으며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처음 그린 마들렌 그림은 예뻤다. 완성된 그림을 들고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걸 내가 그렸다니. 아마도 샤워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 날 이후부터 샤워를 하고 몸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 그림 준비의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담아 그림에 에너지를 쏟고 해 뜨는 것을 보며 한 장의 수채화를 그리는 시간이 쌓여갔다. 그림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해졌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기뻤다.


선물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실은 그 기쁨이 오롯이 내게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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