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율 Dec 20. 2016

나는 착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하루만큼 강해진 당신 앞에 찾아온 작은 습관 여덟

1948년에 개봉한 <가스등(Gaslight, 1944)>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작은 것들을 조작한 후 아내의 반응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내가 이상한 사람임을 납득시키려고 한다.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어둡게 만들고선 "집안이 어두운 것 같지 않냐'라고 묻는 아내에게 그렇지 않다며 "당신이 잘못 본 거야'라는 말로 그녀의 예민함을 탓한다. 계속되는 남편의 질타에 아내는 점점 혼란의 빠지고, 그녀의 유산을 노린 수작임을 알 턱이 없는 그녀는 스스로 예민한 건지, 정말 이상한 건지 걱정하다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영화로부터 가스 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단어가 유래된다.


01. 가스라이팅이란

가스 라이팅(gaslighting)은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이는 주로 부모 자식 관계, 연인 혹은 부부 관계 등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극단적으로 가스 라이팅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상대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낳지 않더라도, '넌 도대체 왜 그래', '왜 그렇게 밖에 생각을 못하는 거야'와 같은 말을 하는 것도 가스 라이팅의 한 형태이다. 가스 라이팅의 피해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읽고 결국에는 자존감마저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02. 연애와 가스라이팅

2년 전 한 사람에게 가스 라이팅을 당했던 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이 용어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같은 사람에게 가스 라이팅을 당해온 상황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전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분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이다.


이별 후, 아주 가끔 느끼는 외로움 빼고는 나는 꽤나 행복하다. 내가 옛날의 나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느꼈고, 심리적으로 점점 안정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안정이 되어가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매일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깼고,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침착함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여태껏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렇게 끝을 낼 수 밖에 없던 사람임을 뒤늦게 깨달은 나에 대한 원망이 날 힘들게 하였다.

나를 억누르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가스 라이팅이라는 용어는 큰 도움이 되었다. 건강하지 못한 연애를 하는 동안 내 자존감이 망가졌음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스 라이팅을 당했던 일화들을 전해 들으면서 나 또한 그런 일들에 무뎌지면서 얼마나 무너져왔는지 마주하였다.

03. 충고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무례함,
가스 라이팅

가까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충고라는 명목 하에 듣게 되는 (어찌 보면) 무례한 말들이 나 자신을 갉아먹게 내버려 둔 것이었다. 외모 지적했던 경우를 하나의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더 예쁠 텐데, 저게 나을 텐데 넌 왜 그렇게 입고 (또는 화장을 하고) 다니니'와 같은 말들을 떠올려보자. (진정으로 조언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대부분 표면상으로는 조언을 하는 것이지만, 상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지적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네이버 웹툰 '내 ID는 강남미인!'의 한 장면이다. 이 만화에서 선배들은 통통한 아이에게는 살만 빼면 예쁘겠다, 머리가 짧은 여학생에게는 기르는 것이 훨씬 여성스럽겠다, 그렇게 입지 말라는 말들을 하며 외모에 대한 품평을 일삼는다. 끊임없이 이러한 얘기를 들어온 후배들이 그 말들에 어느 날 반발하자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충고를 한다는 명목 하에 상처가 될만한 말들을 스스럼없이 내뱉고,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며 예민하다고까지 핀잔을 듣는 것.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가스 라이팅의 모습 중 하나이다. 지적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보듬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적받은 허물에 초점을 맞추고,  상대의 품평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자아는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지인에게 받은 지적과 달리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나 애인에게 받은 이러한 형태로 한 사람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나의 경우는 외모 지적부터 시작해서, 나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경험을 하였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상대는 귀 기울여 듣거나 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서운함을 표현할 때면 돌아오는 것은 '나의 예민함'에 대한 지적이었다. 타지 생활을 하며 연락이 뜸해진 상대를 생각해서 오히려 연락을 줄여 하루에 한번 전화하는 것을 약속하자고 먼저 제안을 하고, 그마저 성의없게 하는 상대의 입장을 끝없이 헤아리다가 속상하다는 것을 2달간 참고 이야기를 하였던 상황이 대표적이다. 오랜시간동안 상대의 기분과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 노력했던 끝에 쌓인 불만을 감정을 절제하며 두세번 이야기했는데, 결국 사과의 말들과 함께 돌아온 것은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것에 대한 속상하다는 감정이었다.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할 때에도 흘려듣고, 나 스스로 언어 사용을 고치려고 노력할 때에도 "왜 굳이" 라는 반응을 하기 일쑤였다. 배려와 예의가 없는 말들임을 직시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한 반응을 보였을 때 계속해서 결론은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가까운 사이인데 그 정도 솔직한게 어때서" 가 그의 논리였다. 일년정도 시간이 흐르자, 가장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 말할 때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04. 무엇이 '진짜' 문제였는가

가스라이팅의 가해자들은 상대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통제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닌 탓에 3개국에서 8개의 학교를 다니며 만년 전학생의 생활을 해온 나에게는 행동할 때 고려해야하는 우선순위는 내가 아니라 항상 남이었다.


다른 나라, 그리고 새로운 학교에는 이미 너무나도 깊은 뿌리를 지닌 루틴이 있었고, 나는 최대한 이를 빠르게 파악하여 맞춰가며 적응 (혹은 생존)을 해나가야했다. 독특한 성장배경 탓에 훈련이 되어서 그런지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의 생존 방식은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로 인해 나도 행복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이라 철썩 같이 믿어왔다.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만든 학년말 설문지에서 '짝꿍이 되고 싶은 사람', '내년에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을 친구', '함께 공부하고 싶은 학우'로 전부 가장 많은 이름이 나온 사람이 나였다는 기억 등은 나 혼자만의 자랑거리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의 장점이라고 봐왔던 성격에도 큰 문제점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내 감정을 보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마냥 착하게 살아온 것도, 남의 눈치만 살피며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오로지 내 감정에 충실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공감하려는 노력은 내가 불행해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끝까지 사랑한다, 너밖에 없다, 많이 후회한다는 말들을 믿으려는 노력, 그리고 이에 돌아서면 상대가 받게 될 상처에 초점을 맞추느라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간과해왔던 것이다.

05. 우리는 착하게 살 것을 요구 받는다

어른들은 보통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이 일러준다. '공감해라', '배려하라', '양보해라'와 같은 가르침 위주로 받고 많이들 자신의 감정 살피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나의 신경은 온통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에 쏠려 있었고, 연애의 기간동안 나는 나의 행복을 잊어갔다. 연애가 끝난 후의 삶은 완전 딴판이 되었다. 자기 생활, 자기 기분, 자신의 루틴만이 우선인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노력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눈치를 안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 할 수 있었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이어가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종이봉지공주의 엔딩 장면

더 이상 물론 배려를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더 이상 착하게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착하게 살아봤자 남는 거 하나 없다는 이효리의 '배드 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어서일까. 한 사람의 프레임에 끼워맞춰지는 것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뛰어가는 종이봉지 공주의 뒷모습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내일 아침에는 자존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던 연애의 망령에 시달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이제 눈치보지 않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하루 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여튼,

나는 착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몽골, 그리고 하늘을 본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