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친절하지 않은 멜버른 여행이다. 꼭 하고 싶었던(정말 이번 아니면 다시 못할 것 같았던) 울룰루 투어(호주 대륙 중심의 앨리스 스프링스 지역에 있는 원주민의 성지)의 일정이 원치 않게 변경되었다. 2박 3일짜리 투어를 할 것이냐 1박 2일을 할 것이냐 끊임없이 고민하다 결국 1박 2일 투어를 선택했는데, in 하는 울룰루 공항으로 시드니에서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문제의 해결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드니를 울룰루 다음 일정으로 미루면 됐다.
그러한 이유로 멜번에서 시드니가 아닌 골드코스트를 먼저 가게 되었다. 시드니-> 울룰루-> 골드코스트의 일정이 골드코스트->울룰루->시드니가 된 것이다. 동선으로 보자면 굳이 돌아가는 상황. 갑자기 내일의 목적지가 달라지니 마음이 어수선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잘 곳은 있어야 하니 부랴부랴 숙소부터 예약하기로 했다. 골드코스트는 내가 살았던 지역이라서 헤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편리한 호스텔 보다는 편하게 묵을 수 있는 아파트형 숙소로 알아보았다. 골드코스트에 있던 시절 자주 이용하던 한인 커뮤니티 웹사이트에 접속해 단기 숙박이 가능한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골드코스트가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여행지는 아니기 때문인지 보통 워홀러나 학생들을 위한 쉐어 하우스 광고 위주였다. 다행히 적당한 곳을 찾을 수 있었고 숙소의 위치나 컨디션을 따질 새도 없이 예약 가능 여부만 확인한 후 급하게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항공사 직원들이 이용하는 스탠바이 티켓은 출발 전 몇 시간까지만 티켓을 구매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 있게 조식을 먹으며 티켓을 예약해보고자 웹사이트를 열었는데, 이럴 수가. 멜버른에서 골드 코스트로 이동하는 모든 비행의 예약 현황이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빨간불은 노쇼 승객이 있지 않는 한 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제 까지만 해도 모두 초록불이었는데..(초록불은 좌석이 여유 있게 남아있음을 의미) 국제선이 아니라 국내선 항공이다 보니 예약 현황을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할 수가 없다. 너무 황당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대로다. 빨갛다. 이 날이 주말인 걸 깜빡했다. 우리나라도 주말에 시외버스, 무궁화호, KTX 자리 없는 거랑 비슷한 거겠지 이들에게 국내선 비행이란..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아.. 이제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골드 코스트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정도면 이동 가능한 브리즈번행 티켓도 알아봤다. 역시나 전부 빨간불이었다.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꼬이는구나 싶다. 어떨 때는 정말 세상이 내 맘처럼 잘 풀려 짜릿할 때도 있는데 말이야. 몇 년 전 읽었던 일본 소설 '스물아홉 생일, 1년 뒤 죽기로 결심했다'에 나왔던 구절이 생각난다.
세상은 나에게 친절할 의무가 없다
브리즈번으로 들어가게 되면 대중교통으로 골드코스트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일단 대중교통으로의 이동은 매우 길고 불편하다. 또 시간이 너무 늦는 경우에는 버스나 기차가 끊기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했다. 그렇게 멍하게 몇 분을 있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일단 체크아웃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짐부터 다시 정리해야 했다. 운이 나쁘면 비행기에 내 자리가 날 때까지 하루 종일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렇게나 대충 하고 나가면 왠지 더 우울할까 싶어 머리도 신경 써서 묶고 편안한 츄리닝 대신에 좀 불편해도 청바지를 입었다. 아무리 그래도 화장은 무리다 싶어 선크림만 좀 발라주고 숙소를 나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돌돌 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버스를 타러 가다 보니 정신이 좀 들었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고 당장 출근을 해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정도 아닌데 이렇게 속상해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떻게든 오늘 안에 골드 코스트든 브리즈번이든 도착하면 되는 거 아닌지. 애초에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이었는데 모든 게 오차 없이 흘러가 주길 바랬던 게 더 넌센스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추가 지출은 있겠지만 뭐 그럴 때는 다른 경비에서 좀 절약을 하면 되는 거고 그것도 아님 나에겐 신용카드가 있으니까...(?) 다음 달에 몇 시간 더 일하면 채워질 지출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여행하다 보면 가끔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여행에서 마냥 즐거운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래도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즐겁자고 한 일이 즐겁지 않아 지면 그것만큼 우울할 수도 없다. 이번 멜버른 여행이 좀 그랬다. 앞서 언급했던 스탠바이 티켓부터 해서 고민 고민하다 결정한 숙소 역시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였다. 나름 깨끗한 숙소를 찾는 다고 그 와중에 비싼 호스텔로 선택했는데 시설도 위치도 별로 였다. 위치가 좋다는 후기가 많아 선택했는데 단지 공항버스 정류장과 접근성이 좋을 뿐. 그것 빼고는 오히려 불편했다. 리셉션에는 시티 맵 정도 조차 비치되어 있지 않았고 조식도 너무 성의 없었다. 게다가 와이파이가 유료였다는 사실. 퍼스에서는 호스텔이어도 아늑한 느낌이 들었는데 멜버른은 그렇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떠드는 유럽 애들 때문에 더 신경질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숙소도 맘에 들지 않고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뭐랄까. 그냥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는 느낌. 이유는 없다. 그냥 내가 느낀 멜버른이 그랬을 뿐. 3일간의 짧은 일정에서 첫날은 그 전날 밤을 꼴딱 새우느라 밀린 잠을 자는데 다 썼고 둘째 날은 투어를 하느라 시내를 돌아보지 못했다. 사실 셋째 날 좀 늦게까지 멜버른에서 머물다가 시드니로 이동할 참이었는데 그것도 무산되었다. 아쉬운 마음보다는 이 도시를 떠나 그리웠던 골드코스트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