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변화가 있었던 3월이 드디어 끝이 났다.
부디 4월부터는 이곳 두바이의 상황도 진전되길 바란다.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확산세가 주춤한 것뿐이지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지만..
이 곳의 상황은 지금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먼저 매를 맞은', 그리고 꽤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고 있는 한국이 부럽다.
한국이라기보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과 교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
이제는 가고 싶어도 비행이 없어 갈 수 없다. 적어도 현 상황에서는.
전세기를 띄우기 위한 수요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손이 떨리는 편도 비행 티켓값(물론 항공업계 종사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때문에 전세기가 뜬다 해도 갈 수 없다.
불과 지난 1-2주 동안 두바이에서는 너무나 많은 발표와 뉴스가 있었다.
먼저 모든 공원, 짐, 파크 등을 잠정적 폐쇄한다고 했고 며칠 뒤 모든 비치, 수영장 그 후론 모든 종교 활동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일 충격받았던) 모든 쇼핑몰과 레스토랑 폐쇄 발표가 이어졌다.
모든 entry 비자 발급 중지에 이어, UAE residence 비자 홀더들 마저 입국 금지.
그 후엔 모든 자국민들마저 정해진 날짜 안에 귀국하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승무원으로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UAE 내 모든 여객기 운항 금지 조치에 이어.
지난주 주말부턴 컬퓨(curfew;통행금지)까지 시작됐다.
우리 세대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조금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 비행을 한 게 언제였더라?
그게 3월 17일이니까 벌써 2주가 지났다.
게다가 3월 첫째 주는 휴가였는데 그때 당시 한국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냥 두바이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어디라도 갔을 텐데 말이다.
느낌으로는 이미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안 하는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도 "유급휴가"였으면 그렇게 고달프지 않았을 거다.
평소에 받는 만큼의 월급을 유지하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물론 답답하기야 하겠지만, 뭐.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에겐 다른 이야기다.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승무원들의 월급은 기본급+비행수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회사 같은 경우는 기본급+주택보조금+비행수당(보통 1+1+1.5의 비율)으로 받는데.
일단 3월 비행을 거의 하지 않았고 4월도 비행이 없을 예정이니 월급의 3분의 1 이상이 줄어드는 셈이다.
게다가 UAE 내 항공사들이 기본급 감봉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월급은 거기서 더 줄어들 예상.
월급 문제는 현실이다, 정말.
예전에는 얼마를 저축하고 말고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생존'의 문제이다.
이번 달 월급으로 두바이의 월세(비싸 기로 소문난)를 내고 각종 공과금을 내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게 전혀 가능할 거 같지 않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변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외출을 하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고, 사람 만날 일이 없으니 일단 화장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난 원래 화장하는데 관심도 많고 꽤 진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쌍꺼풀 없는 밋밋한 눈매의 소유자인 것도 한몫하지만 출근할 때마다 풀메이크업을 해야 하니 대부분의 날들은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또 자기 전에는 그 걸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우는 일을 반복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거의 화장할 일이 없다.
정말 가끔 기분 내고 싶을 때 피부톤을 화사하게 하기 위해 쿠션 파운데이션을 톡톡 바르는 정도가 전부.
사실 화장을 안 하고 피부를 쉬게 해 주면 피부가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피부빛은 더 칙칙해진다.
생기가 없어진 느낌이랄까.
외출하지 않는 한 아침에 세수를 잘하지 않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햇빛을 쐬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억울하다.
여하튼 궁지에 몰리니 건강관리를 하게 됐다.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며.
몸이 조금만 더워도 열이 나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헛기침만 나와도 네이버에 '코로나 증상'을 검색하게 되는 요즘.
그 귀찮다는 해독주스를 만들어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몇 년 전에 류머티즘 진단을 받은 후, 매일 집에서 해독주스를 만들었는데.
휴가로 집에 갈 때마다 직접 야채를 삶아서 식혀서 갈아서 컵에 따라서 대접해도 거절했던 '그' 해독주스를 요즘은 내가 직접 만들어 먹고 있다.
한 번에 4일 치 야채를 삶아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매일 아침 그것들과 사과, 바나나 반개를 추가해 믹서기에 갈아 마신다.
신기하게 전혀 귀찮지도 않고, 맛없어서 못 먹겠다는 생각도 안 든다.
거기다, 하루에 최소 1시간 이상의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2주간 운동을 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운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특히 매일 오후 5시에서 6시에 밖에 나가 동네를 빠른 걸음으로 뱅뱅 돌다가 통금이 시작되는 8시 전에 돌아오고 있는데 귀찮기는커녕,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실하게 임하고 있다.
그러고 집에 오면 다시 30분가량 홈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2-3일 운동하는 것조차도 잘 지키지 못했는데 요즘은 운동하는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감사하다.
모르겠다..
'자유'라는 것의 의미를 배워가는 시간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모든 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다.
언제 이 모든 게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못할 것도 아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오히려 퇴사 후 전세기 편도 티켓값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5년 동안 몸담은 직장을 포기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이 사태가 앞으로 몇 개월, 아님 그 보다 더 오래 지속돼서.
그동안 당연히 내 것이라고 여기고 누렸던 것들이 사라지고 힘든 날들만 계속된다고 해도, 알량한 돈 계산에 쉽게 이 곳을 떠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남아돌아 오랜만에 이불 빨래를 하고, 일부러 입사 초에 쓰던 낡은 이불보를 꺼냈다.
처음 두바이에 와서 살림살이를 마련하던 그때 샀던 분홍색 체크무늬의 이불보.
사고 나서는 왠지 촌스러운 것 같아 후회도 많이 했었다.
그 후로는 단색의 심플한 것들만 사용했었는데.. 몇 년 만이다.
내가 어떻게 이 곳에서 5년이나 살았을까.
정말, 정말.
매일은 되뇌어도 위안이 되는 한 가지는.
적어도 이런 위기를 나 혼자 겪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그 나름대로의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
나는 비행이 뚝 끊긴 나만. 승무원들만 힘든 줄 알았는데.
재활 치료 병원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환자가 없어 월급이 감봉되었다 하고.
물류 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매 순간 변동되는 물류비용과 항공편 변화 때문에 스트레스와 업무량이 극에 달했다고 했고.
건설 회사에 다니는 친한 오빠는 필수 직군으로 분류되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위험한 상황에도 정상근무를 한다고 했다.
전업 주부인 교회 집사님들은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보느라 본인만의 시간이 하나도 없다고 했고.
두바이에 교환학생을 와있던 어떤 동생은 수업은 취소되었지만 발이 묶여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모두가 비슷한 만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이 모두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이 어려움이 끝난다 해도,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다시 불평할 테지만.
그래도 정말 큰 상처 없이 이 어려움들이 모두 지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