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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23. 2020

고립 또 고립

두바이에 있는 항공사에서 크루로 일하게 된지 이제 만 5년이 다 됐다.

항공업계가 어렵다는 말은 이미 몇년전부터 공공연히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어려웠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당장 문을 닫게되는 항공사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우리 회사는 3월 초부터 국제선 비행이 서서히 취소되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 외국발 비행 자체를 막는 경우도 있고 수요가 너무 떨어져 수익이 나질 않아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3월 중순이 되자 대부분의 비행이 취소됐다.


비행이 없어지니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아졌다.

다른 업계 종사자들도 물론 코로나 때문에 일거리가 줄어들고 한가해진 건 매한가지겠지만 크루들은 정말 하루 아침에 백수신세가 됬다.


그래서 우리는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크루들에게 무료입장을 제공하는 리조트 야외 수영장에 자주 갔다.

비행이 취소되는 것과는 별개로 사실 두바이 내부에서의 큰 동요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외 수영장을 즐기는 게 가능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는 그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이야기가 됐다.




요즘 운동하는데 재미를 붙여 매일 짐(gym)에가서 운동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 집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짐에 가서 유산소 운동을 하고 저녁에는 스쿼트나 푸시업 같은 근력 운동을 했다.

버틸만했다.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일상이 허전하진 않았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몸도 가벼워졌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UAE에서는 모든 영화관, 공원, 짐 등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운동할 장소가 없어졌다.






처음 며칠은 고민에 빠졌다.

운동하고 싶은데 집에서 하기는 영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대안을 찾다가 우리 집 근처 비치에 있는 러닝 트랙이 생각났다.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건물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는 집 밖에 나와 엘리베이터만 타면 됐었는데 이제는 필요한 이것저것 들을 챙겨 주차장에 간 후 차를 끌고 나가야 했다.

야외이다 보니 운동복을 입는 것도 조금 더 신경이 쓰였고 러닝 머신과는 다르게 달리는 동안 마땅히 휴대폰이나 차키를 둘 곳이 없어 손이 불편하기도 했다.

운동하기 위해 매일 귀찮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 정말 맞나 보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이동 시간이 좀 걸리는 건 큰 문제가 안됐고, 달리는 동안 휴대폰과 차키를 보관할 암밴드도 장만했다.

아직은 바깥 날씨가 좋아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보다 훨씬 상쾌했다.

트랙 주변 곳곳에 2 미터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라는 표지판들이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동네여서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모든 비치 마저 폐쇄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새로 산 암밴드를 개시해보기도 전이다.

힘이 쭉 빠졌다.

이제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제는 정말 어디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구나.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잘 버티고 있던 회사 동료들도 이제는 지친 듯한 기색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찾아야 했다.

결국 집에 매트를 깔고 홈트를 시작했다.




몇 시간 전.

전 세계 최대 규모인 두바이의 에미레이트 항공이 25일부터 모든 여객 운송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올 것이 왔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우리 회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발표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여기서 '나가는 것'이 가능했는데 앞으로는 그것 조차 불가능해진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무급휴가를 장려하고 있기 때문에 자가격리를 하게 되더라도 한국에 갈까 했지만 일단 UAE를 나가면 언제 다시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UAE는 현재 해외에서의 입국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곧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임대 계약도 연장해야 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서서히 비행이 재개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출국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어진다니..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곧 쇼핑몰이나 레스토랑 카페 등의 이용도 제한될 게 분명하고 유럽이나 미국처럼 외출금지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만 같은 지금.

무엇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야 할까 걱정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버리는 시간들이 아깝다.




오늘부턴 정말 계획적으로 살아보려고 준비했는데 시작부터 삐끗하니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간을 멈추고 싶다.

시간은 멈추고 코로나만 흘러가버렸으면 좋겠다.

33살의 3월도, 따뜻한 봄도 벚꽃도 다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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