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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Apr 06. 2020

소모적인 일상, 느려진 하루

상황에 집중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상황은 오늘 부로 더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안 좋아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었다.

역시 두바이는 언제나 (그들이 바라는 도시의 이미지와 같은) 'beyond expectation'이다.


저녁 8시부터 오전 6시까지 였던 부분적 통행금지는 오늘부터 24시간이 되었다.

식료품 구매는 여전히 가능하지만 가족 구성원 중 한 명만 나올 수 있으며 무조건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이유로든 집 밖에 나서는 경우, 온라인에서 퍼밋(허가서)을 받아야 한다.


사실, 어젯밤 까지만 하더라도 '에이. 그냥 겁주는 거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두바이 도로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그냥 지나가기만 하는 차량'에게도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트렸다는 괴담이 돌았고 몇 시간 후 그 괴담은 결국 사실인 걸로 밝혀졌다.




두바이는 '몇 월 며칠부터 이런 이런 조치가 취해질 거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같이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늘 '지금 이 순간부터 금지' 같은 식의 통제를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체념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만약 '내일부터 금지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남은 시간 안에 뭐라도 해보려고 엄청나게 분주했을 거 같은데 고민할 시간 조차 없게 '응. 이 뉴스를 보는 순간부터 금지~'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자꾸 겪다보니 뉴스를 접한 처음 5분 정도는 충격으로 멍해도 금세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바이에서 전형적인 '밖순이'였다.

비행이 없는 날은 대부분 지인들을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취미 생활도 했다.

혼자서 카페도 가고 쇼핑도 잘했다.

집에 오롯이 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바깥 활동을 즐겼다.


그래서 통제가 시작된 초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보다 더 하이 레벨의 '밖순이'인 회사 동생은 코로나 사태가 끝난 뒤에 잠에서 깰 수 있는 수면제가 있으면 당장 먹었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상황이 점점 우리를 집 속으로만 밀어 넣으니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 두 가지가 있다.


집, 그리고 나 자신.




집에만 있으니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물건들도 그렇고, 뽀얗게 먼지가 쌓인 서랍장도 그렇다.

흙먼지 가득 낀 베란다 문도 답답하고 부엌 선반에 방치된 먹지 않는 군것질 거리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 전에는 신경 쓰여도 귀찮아서 애써 무시했었는데..

무시하고 뒤돌아서기에 이제는 마주치는 순간들이 너무 잦아졌다.

어쩔 수 없이 하루에 하나씩 처리하기로 했다.

사실 막상 착수하고 보면 한 시간도 안돼 마무리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땐 왜 그렇게 귀찮아서 미루고 미뤘는지 모르 일이다.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바닥은 또 얼마나 금방 더러워지는지 모른다.

하루만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금세 머리카락 투성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항상 바닥에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던 기억이 나서 결국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원래 집 청소가 매일 해야 되는 거였어?"

"......."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코로나를 통해 청소는 매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항상 화장대 겸용으로 쓰고 있는 책상에서 불편하게 밥을 먹었다.

먹을 때마다 이리저리 음식물이 튀여 닦아내느라 바빴지만 '얼른 먹고 치워야지' 하는 마인드였다.

하지만 삼시세끼 챙기는 일이 하루에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다 보니 그것들이 여간 불편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불편함도 그렇지만 '식사'라는 중요한 임무를 아무렇게나 해치운다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잡동사니 쌓아두는 용도로 방치돼있던 작은 소파 테이블을 정리하고 깨끗이 닦았다.

이제 식사는 거기에서 한다.

없는 살림에 테이블 매트도 하나 구매해 깔았다.

냄비채로, 프라이팬채로 먹던 습관도 고치고 적당한 그릇에 담아 먹는다.

그렇게 차리고 보니 괜히 사진도 찍고 싶고 그렇다.

사진을 찍다 보니 또 예쁘게 차리고 싶게 되고.




예전에는 살을 빼기 위한 목적으로만 식단 관리를 했다.

야채나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한다거나 양을 줄인다거나.. 하는 식 말이다.

나름 건강 생각해서 영양제도 가끔 사다 놓았지만 매일 챙겨 먹지는 않았다.

간절하지 않았던 거지.


요즘은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나도 언제든지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해 먹기 귀찮기로 유명한 해독주스를 2주째 만들어 먹고 있고, 종합 비타민을 챙기는 것도 절대 잊지 않는다.

다이어트 때문에 절제했던 탄수화물도 영양 불균형을 방지하기 위해 조금 늘렸다.


왠지 목이 칼칼하고 건조한 거 같다 싶으면 가습기를 풀가동하고 얼마 전 선물 받고 제대로 먹지 않았던 천연 꿀을 아주 꿀떡꿀떡 먹어재낀다.

덕분에 건조했던 목이 아주 많이 나아졌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다.

채소나 과일, 고기 같은 건강한 재료들은 마트에서 좋은 것을 고르기도, 손질하기도, 조리하기도, 보관하기도 귀찮다.

채소 볶음 하나만 하려고 해도 집에 있는 온갖 조리기구가 다 동원된다.

준비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나면 또 그게 끝인가?

싱크대를 가득 채운 설거지거리를 보면 또 어찌나 한숨이 나오는지.


반면에 인스턴트나 배달음식은 그렇게 쉬울 수가 없다.

심지어 더 맛있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깨닫는 것.


좋은 건 절대 쉽게 얻지 지지 않는다.




아침 10시쯤 느지막이 일어나도 하루는 길기만 하다.

덕분에 요즘은 책도 많이 읽고 매일 운동도 한다.

도레미파솔라시도밖에 몰랐던 내가 코드를 익혀 피아노 연습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쓴다.

시간낭비라고 여겨 멀리했던 넷플릭스도 실컷보고 관심 있는 유튜버의 영상들도 몇 시간씩 본다.


커피는 '믹스'라며 집에서는 인스턴트커피만 고집하던 내가 요즘 핸드드립 커피의 맛을 알게 됐다.

2-3시쯤 되면 자매처럼 지내는 옆집 동생이 커피를 마시자고 부른다.

그럼, 하던 일이 있어도 내려놓고 달려간다.


똑-

똑-

커피는 천천히 떨어진다.

작은 필터를 쓰는 탓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붓고 한참 기다리고 또 조금 붓고 한참 기다리고의 시간을 반복한다.

집안 가득 커피 향이 점점 퍼질 때 나는 언제나 묻는다.


"뭐 달달한 거 없어?!"


향긋한 커피와 함께 할 간식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다.

믹스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쌉싸름하고 시고 프루티 한 원두커피의 맛을 느끼며 수다를 떨다가 다시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다행인 건 말이지.

소모적인 일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요즘이지만, 적어도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멈춰있으니까.

집 밖에 나가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다면 쓸데없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거 아니겠어?

나같은 게으름뱅이에게 이보다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던가?




부디 건강하게 이 시간을 지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이 시간을 무사히 이겨내고 다시 한국에 가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난다면 얼마나 기쁠까?

두바이에 종교 행사 금지령이 철회되고 다시 교회에서 모두를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부르즈 칼리파가 보이는 야외 레스토랑에서 그동안 못한 친구들 생일파티도 실컷 하고 예전처럼 웃고 떠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집에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해야지.


그때까지 나는 더 건강한 사람이 되어있어야겠다.

더 건강하고 향기 나는 사람이 되어있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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