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가체프'는 많이 들어봤지만 뭔지는 잘 모르겠다면
핸드 드립 커피를 즐겨 마시게 된 건 언제부터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전 직장이 있던 이대 앞에는 커피가 맛있는 집이 꽤 있었다. 예전 명성과는 다르게 홍대나 신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권이 잠잠해진 곳이었지만, 대학가라는 특성 때문인지 알짜배기인 곳들이 꽤 많았다. 더치커피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카페 '낫띵벗커피'를 자주 찾았는데, 아메리카노와는 다르게 맛은 부드러우면서 끝에는 초콜릿 향이 나는 것이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블렌딩 된 원두로만 더치커피를 판매하시던 사장님은 언젠가부터 '첼바'라던지, '버번'같은 이름을 써 붙이시고는 스페셜 더치 한정 판매를 하시기 시작했다. 딸기향이 난다던 '첼바'에서는 정말로 딸기향이 새초롬히 났고, 사실 '버번'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어쨌든 맛있었다. 그 맛을 본 이후로는 500원 비싼 건 생각도 않고 한정판 더치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에 들었던 커피 추출 수업 때는 '모모라'를 만났다. 선생님이 가장 애호하는 원두라며 맛 보여 주셨을 때다. 산미가 있는 원두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아마 차원이 다른 산미를 느끼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 하시더니 내려주신 커피는... 커피가 아니었다. 아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이제껏 맛보았던 커피와는 아주 달랐다는 말이다. 오렌지같은 과일차 티백을 우린 건가 싶을 정도의 산뜻하고 상큼한 맛. 그 맛의 경험이 너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는지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어머' '우와' '아니 어떻게'라는 감탄사만 연발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지인들에게 그런 차 같은 커피가 있다면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런 커피를 주로 마시게 될 미래(는 지금)는 상상하지 못한 채.
가_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첼바 내추럴, 나_브라질 옐로 버번 내추럴, 다_에티오피아 단세 모모라 내추럴.
이렇게 가, 나, 다를 예로 들여다보자. 이전 글에서 내추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면 다른 부분을 해석할 차례다. 에티오피아나 브라질은 당연히 생산되는 나라의 이름이고, 문제는 이후에 나오는 부분이다. 배우는 사람 마음 야속하게도 원두마다 표기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예가체프는 생산 지역, 옐로 버번은 노란 체리 열매를 맺는 커피 품종, 단세 모모라는 재배지역인 단세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란다. 첼바는 에티오피아 게데오 지역에서 재배된 커피를 가공하는 협동조합을 일컫는다고.
이렇듯 생두의 특징을 구분하는 산지, 품종, 농장, 특수한 지명, 가공방법, 가공하는 공동체(조합) 등을 산지 국가명 뒤에 이어 붙인다. 이름과 얼굴을 당당히 내걸고 몇십 년째 자리를 지키는 누구누구 할머니 국밥집 같은 느낌이랄까. 결국 생두의 출처를 명확히 하는 것은 품질과 맛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겠지? 고로 커피 이름이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다!
최근에 망원동에 있는 카페 '딥블루레이크'에서 '니카라과 라 벤디시온 파카마라 내추럴'이라는 원두를 구매했다. 붉은 과일을 연상시키는 산미가 와인을 떠올리게 해서 연말 시즌에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피. 라 벤디시온은 누에바 세고비아 지역의 농장인데, 스페인어로 '신에게 받은 축복'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2018년에는 무려, 그 해 최고의 커피를 뽑는다는 C.O.E(Cup Of Excellence) 대회에서 1위를 하기도 한 커피라니. 그 명성에 커피 한 모금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파카마라'는 '파카스'와 '마라고지페'라는 품종 2개를 교배해 만든 교배종이다. 마라고지페는 나무의 키도 크고 콩의 크기도 커서 '엘리펀트 빈(Elephant bean)'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 때문에 파카마라 원두의 크기는 다른 원두랑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엄청 크다. 커피 이름 하나에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앞으로 원두 이름이 길다면 컵 노트가 적힌 카드를 유심히 보거나 검색 한번 해보기를 추천한다. 그렇게 점점 커피 속으로 빠져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