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2021.09.01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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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휴가를 냈다가 다시 연구실에 돌아갑니다. 제가 맡은 과제가 있어 혹여 연구실에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간 큰 문제없이 잘 돌아갔습니다. 연구실이 그랬었던 것처럼 이제 제가 떠나게 되는 집안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당장의 번거로움은 있겠지만 남은 가족 구성원들이 어떻게든 잘 적응해서 살아갈 겁니다.


생각해보면 세상만사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관계에서 혹은 조직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겠지만, 당장의 빈자리만 느껴질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채워지고 다른 모습으로 잘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가족과 같이 매우 가까운 사이에서의 공백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끝내 무뎌져 각자 현실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면 굉장히 슬펐는데, 또 요새는 반대로 즐겁고 다행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해외 유명가수인 빌리 아일리시는 한 인터뷰에서 누구나 언젠가 잊힌다는 사실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언젠가 죽을 테고, 죽은 후에 자신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들도 끝내 죽고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성취나 잘못도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는 뉘앙스의 인터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 또한 비슷한 생각이 많이 드는 오늘입니다. 스스로가 너무 많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구나. 내가 아니어도 연구실과 우리 가족, 그리고 이 세상은 어떻게든 나름의 구색을 갖춰 잘 돌아가겠구나라는 일종의 안도감이 들었어요.


가끔 감당할 수 없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뭐든지 다 잘 해내야 할 것 같고, 완벽해야 할 것 같고, 내가 잘못하면 무언가 크게 망가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사실 잘못을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그 실수 하나가 있어도, 제가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도 잘 돌아가니까 말이죠. 물론 강한 책임감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실수와 잘못을 마주했을 때 책임감에 심적으로 괴로워만 하는 것보다는, 잘못을 인정하여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적극적으로 고쳐 나갈 수 있는 탄성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 겸허하면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니어도 잘 돌아갈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무언가를 잘못하고 틀렸을 때는 어차피 세상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을 테니, 불필요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마주한 실패를 솔직히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면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살면 너무 무력하지도 자만하지도 않는 딱 적당한 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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