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쓴 규정의 언어

박물관의 하루 _12

by Jino

"아빠가 너무 잘 만드셨다!"

"아, 삼촌 이에요."

삼촌과 체험 나온 초등학생한테 나도 모르게 했다가 들은 말이다. 별 일 아니라면 별 일 아니라고 넘어갈 대화지만 나는 괜히 미안했다. 내가 그런 경험을 많이 당하기도 했는데 나도 모르게 했다는데 적잖게 놀랐다.이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봐야 하나 보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윤택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잘못 썼다간 상처만 안길 수도 있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아빠가 바빠서 삼촌이 대신 올 수도 있고 아빠가 멀리 있어서 삼촌이 대신 올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디를 가나 똑같은 질문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니 아빠와 딸로 보이든 엄마와 아들로 보이든, 부부로 보이든, 남매로 보이든 내가 확실히 알게 되기 전까지 그런 규정은 짓지 말자, 나는 혼자 다짐하게 됐다.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일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섣부른 간섭이나 참견도 말자, 다만 관심사에 대해서는 맘껏 수다를 떨자. 언어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윤택하게 하는 용도로만 쓸 수 있도록 현명해 지자.


신문사에 다닐 때다. 출입처가 바뀔 때마다 인사를 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뻔한 질문에 질식할 뻔 했다. 이런 식이다.

결혼 하기 전에는 "결혼 했어요?" 라고 묻는다. "아니요." 라고 하면 "결혼은 해야지!"라고 답한다. (때는 1990년대 초 부산임을 감안해 주시길.)

결혼하고는 "결혼 했어요?"라고 묻는다. "네!"라고 답하며 '이제 더 할 말 없지?' 싶었는데 "애는 낳았어요?"라고 묻는다. "아니요." 라고 하면 "애를 낳아야지!"라고 답한다. (내가 애를 낳든 말든!)

드디어 애까지 낳았다.

또 묻는다. "결혼 했어요?"라고. "네!" 라고 답한다. "애는요?" "낳았어요."(쓸데없이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나 허를 찌르는 질문. "몇 명이에요?" "1명요." (근데 그건 왜?) "애는 둘은 낳아야지." (헉! 내 출산계획을 왜 당신이!)


이 질문 양식은 마치 정해진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았다. 인사 때마다 이런 질문을 계속 듣고는 알게 됐다. '아, 이 사람들은 내게 별 관심은 없구나! 그저 정해진 질문을 하는 거구나.'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뻔한 사회적 관계' 가 많기도 했으니까.


남자 동료와 어디 같이 다니기라도 하면 '사귀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비슷한 나이의 남녀가 함께 어디를 다닌다고 '부부'로 규정 짓는 문화는 어디서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의 사회 생활이 이렇게 활발한 때에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많이 지적되고 있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잘못된 표현 중 하나가 "몇 학번이에요?" 다. 대학을 당연히 다녔을 것이란 전제는, 그 표현 만으로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을 소외시킨다. (알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이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이렇게 나를 규정 짓는 문화에 질식할 것 같았던 내가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 어르신이 오셔서 무슨 말 끝에 "어이구 오래 살면 이렇게 아무 소용없어!"라고 하시는 거다. 어르신들의 단골 대사이기도 하다. 그때 문득 생각나서 말씀드렸다. "아프리카에서는요, 어르신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졌다고 한대요. 그만큼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으시니까요." 함께 온 따님이 그 표현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나도 덩달아 좋았다.


쓸데없는 말은 않는 대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아는 현명함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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