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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 Feb 15. 2022

내가 알던 책이 아니었다!

레미제라블 1권을 읽고

레미제라블 1



레미제라블. 

대략의 줄거리를 알기에 책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전과 실제 책을 제대로 읽고 보면 큰 간극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미제라블은 1권에서부터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스토리의 개연성과 서사, 살아 숨쉬는 듯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대단하지만 당시 시대를 충실히 담으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혜안이 드러나 있어 이 책을 ‘소설’이라는 범주에 넣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내게는 소설이라기보다 인간과 삶, 사회에 대한 많은 사색을 불러오는 책이었다.


누구나 아는 레미제라블의 줄거리. 주인공은 그렇다, 장발장이다.

너무나 힘든 환경 속에서 배고픔에 못 이겨 빵 하나를 훔친 이 사내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탈옥을 감행한 죄가 더해져 장장 19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장발장은 유죄 선고를 받았다. 법전의 규정은 명백했다. 우리들의 문명에는 무서운 시기가 있다. 형벌이 파멸을 선고하는 시기가 그렇다. 사회가 생각하는 인간을 회복할 길 없이 버리고 떠나갈 때, 그것은 얼마나 슬픈 순간인가! 장 발장은 오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57p)>


형기를 마치고 나와 술집에서 허기를 달래려 했으나 전과자라는 이유로 자기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헤매다가 자기를 대접해 준 주교의 은촛대와 접시를 훔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교는 장발장의 죄를 감싸주었고 이 일을 계기로 장발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도둑이나 살인자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돼. 그건 외부의 위험이고 작은 위험이야. 우리들 자신을 두려워하자. 편견이야말로 도둑이고, 악덕이야말로 살인자야. 큰 위험은 우리들 내부에 있어. 우리들의 머리나 지갑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영혼을 위협하는 것만을 생각하자.(55p)>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팡틴, 코제트의 엄마다.

귀족 사내와의 사이에서 난 코제트를 여인숙에 맡긴 팡틴은 여인숙 부부의 탐욕에 희생당한다. 일을 하기 위해 코제트를 맡겼지만 이 부부는 코제트에게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며 받아내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팡틴은 자신이 일하던 공장 - 장발장이 마들렌이라는 또 다른 신분으로 운영했던- 에서의 모함으로 공장에서도 쫓겨난다.


<세상에는 자기에게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남의 행위를 엿보려고 기를 쓰는 사람이 있다. 왜 그 양반은 언제나 석양 녘에만 올까? 왜 아무개씨는 목요일이면 꼭 나갈까? 왜 그 남자는 언제나 뒷골목으로만 다닐까? 어째서 그 부인은 언제나 집에 다 오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릴까? 어째서 그 여자는 자기 집 ‘서랍 속에 담뿍 두고도’ 편지지를 사러 보낼까? 등등.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물론 자기에게는 하등 쓰도 달도 않은 그러한 수수께끼의 열쇠를 손에 쥐려고 열 가지 선행을 하는 데 드는 것보다도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더 많은 수고를 한다. 그런데 그 짓을 즐거움을 위해 무보수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호기심으로 얻는 것은 호기심뿐, 그 외에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그들은 며칠이고 남자나 여자의 뒤를 밟는가 하면, 춥고 비 오는 밤에 몇 시간이고 길모퉁이나 골목의 문 아래에 서서 망을 보고, 사환들을 매수하고, 마차의 마부들이나 하인들을 취하게 하고, 시녀를 매수하고, 문지기를 손에 넣는다. 왜 그러는가? 공연히 그런다. 오직 알고 싶고, 보고 싶고, 들추고 싶은 일념에서. 순전히 지껄이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에. 그리고 흔히 그러한 비밀이 알려지고, 그러한 기밀이 공표되고, 그러한 수수께끼가 백일하에 드러나면 파국이, 결투가, 파산이, 가정으 ㅣ파탄이, 일생의 파멸이 야기되고, 그들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단순한 본능에서 ‘모든 것을 발견한’ 그들은 그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한심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지껄여야 할 필요에서 악인이 된다. 그들의 대화는, 객실이나 응접실에서의 한담설화는 순식간에 장작을 태워 버리는 벽난로와도 같다. 그들에게는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그 연료란 곧 이웃 사람들이다. (319~320p)>


 <빅튀르니앵 부인은 이따금 창에서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자기 덕분에 ‘될 대로 된 그 계집’의 궁상을 알아보고는 기뻐했다. 심술꾸러기들은 시커먼 행복을 갖는다. (326p)>


이 가련한 여인은 코제트의 양육비를 위해 몸을 팔고 멀쩡한 앞니를 뽑는 지경에 이른다. 마들렌 시장이 자신을 쫓아낸 것으로 알고 있던 그녀는 우연히 마들렌 시장과 마주치게 되고 마들렌-장발장-은 그녀의 기구한 사연에 어쩔 줄을 모른다.


한편 마들렌을 장발장으로 의심해 오던 자베르는 (누명을 쓴)장발장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마들렌 시장에게 자신을 파면시켜달라고 말한다. 

<(자베르에 대한 묘사)그는 제 아비가 탈옥한다면 아비라도 포박했을 것이며, 제 어미가 금령을 범한다면 어미라도 고발했을 것이다. 그것도 덕성이 주는 내심의 만족 같은 것을 느끼면서. 게다가 청빈한 생활, 고독, 헌신, 청렴, 유흥의 전무. 그는 냉혹한 의무요, 스파르타 사람들이 스파르타를 이해하고 있었듯이 이해된 경찰관이요, 무자비한 감시자요, 완강한 정직이요, 냉정한 밀정이요, 비도크(프랑스의 도적이며 협잡꾼으로 갖은 악행을 저질렀으나 나중에 형사 반장을 지냈다.)속에 사는 브루투스(자기의 사상에 모든 것을, 생명까지 바치는 불요불굴한 인간을 가리킨다.)였다. (309p)>


생각지도 못한 자베르의 말에 자신 대신 누명을 쓴 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장발장. 외면하면 일신이 평안할 것이나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양심에 괴로워하던 그는 이제나 저제나 코제트를 데려다 주기를 기다리는 팡틴을 병원에 두고 누명을 쓴 이의 재판이 열리는 법원으로 향한다. 


 <그는 살인자가 되고 있었다! 그는 죽이고 있었다, 한 불쌍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죽이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그 끔찍한 산 죽음을, 형무소라는 그 백주하의 죽음을 주고 있었다! 반대로 자수하고, 그토록 비통한 오류의 희생양이 된 그 사나이를 구출하고, 자기 이름을 밝히고, 의무를 다하여 다시 죄수 장 발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자기의 부활을 성취하고 자기가 벗어난 지옥의 문을 영원히 닫아 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외관상 그 지옥에 다시 떨어지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소설로 접하면서 새삼 감동했던 부분은 주교가 장발장을 감싸주는 장면, 그리고 장발장이 자신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이의 누명을 벗겨주는 장면이다. 마치 수미상관처럼 이 두 이야기는 레미제라블 1편의 앞과 뒤에 나와있는데 아는 이야기임에도 그 과정을 따라가는 순간은 벅찬 감동이었다.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앞서 보여주는 주교의 삶과 태도는 이 소설 전체의 암울한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한줄기 빛살처럼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한다. 누군가 잘못을 하면 앞서서 비난하고 처벌한다. 하지만 그간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돌아보면 전혀 다를 때가 있다. 장발장을 나쁘게 보자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도둑이요, 팡틴은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은 여인이다. 또 자베르는 어쩌면 정의로운 법의 집행자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주인공들의 사연과 앞뒤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판단은 확연히 달라진다.      

<우리는 위험이 있는 동안에만 싸움을 좋아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최초의 투사들만이 최후의 전멸자가 되는 권리를 갖는다. 흥성할 때에 집요한 비난자가 아니었던 자는 몰락 앞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성공의 고발자만이 몰락의 정당한 판정자다.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나서서 타격을 가할 때에는 하느님에게  맡겨둔다. (94p)>



소설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의 전후. 책 전체에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반대의 성찰이 함께 엿보인다.      

<그렇소, 진보의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 (86p)>

<많은 사람들이 은빛 백합꽃 장식을 물결 모양의 흰 리본에 달고 다녔는데, 1817년에는 아직 그것이 단춧구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여기저기 빙 둘러서서 갈채를 던지고 있는 통행인들의 한가운데서, 윤무를 추는 소녀들이 당시 유명했던 부르봉 파의 무도곡을 부르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를 공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다음과 같은 후렴이 붙어 있었다.


 겐트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돌려 다오.

 우리 아버지를 돌려 다오. (238p)>


<프랑스인에게 파리 사람은 마치 그리스인에게 아테네 사람과 같다. 그들만큼 잠 잘 자는 사람도 없고, 그들만큼 정말 경망하고 나태한 사람도 없으며, 그들만큼 잘 잊어버리는 체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얼마든지 번둥거릴 수도 있으나 종말에 명예가 있다면 분연히 궐기한다. 창을 주면 8월 10일(프랑스 왕권 정치 혁명) 같은 봉기를 일으킬 것이고, 총을 주면 아우스터리츠 같은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들은 나폴레옹의 거점이고 당통의 근거다. 조국을 위해서는 군대에 들어가고, 자유를 위해서는 포석을 빼서 싸운다. 조심하라! 그들의 노발충관은 서사시와 같고, 그들의 작업복은 고대 그리스의 군복과 같다. 경계하라! 그르네타(파리) 거리와 같은 거리라면 어떤 거리든 그들에 의해 완강한 창칼의 관문이 되리라. 때가 오면 이 파리 교외의 주민은 커지고, 이 소인은 일어나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그의 숨결은 폭풍이 되고, 그 가냘프고 가엾은 가슴에서는 알프스의 습곡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바람이 나오리라. 프랑스 혁명이 유럽을 정복한 것은 군대의 힘도 빌렸거니와 이 파리 교외 주민의 덕택이다. 그는 노래한다. 그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그이 노래를 그의 천성에 맞춰라. 그러면 당신은 보리라! 그의 노래가 <카르마뇰>밖에 없는 한 그는 루이 16세밖에 거꾸러뜨리지 못한다. 그에게 <마르세예즈>를 부르게 하면 그는 세계를 해방하리라. (241p)>          

 개인적으로 이 시대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몇가지 대목들이 있었다. 당시의 모슬린 옷 ‘칸주’의 유래가 날짜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또 일종의 모슬린 웃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마르세유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칸주라는 것인데, 칸주라는 이름은 ‘캥즈 우(quinze aout, 8월 15일)’라는 말이 칸비에르(마르세유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거리)에서 잘못 발음되어 생긴 것으로, 좋은 날씨나 더위, 한낮 따위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230p)>     

시테라 섬의 상징이 무엇인지도 소개되어 있다. 흥미로운 건 시테라 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바토의 그림을 예로 들고 또 다른 화가와 비교한 것처럼 이 책에는 당대의 문인, 학자, 언론가, 예술가들이 대거 인용된다. 

<시테라 섬(지중해에있는 섬. 비너스의 신전이 있는 이 섬은 애정과 황홀의 섬이다. <시테라 섬으로의 출발>(1717)은 바토의 걸작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으로 출발!”하고 바토는 외친다. 평민 화가인 랑크레는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부르주아들을 바라본다. 디드로는 그 모든 연애들을 붙잡으려고 팔을 내밀고, 뒤르페는 그러한 연애에 드루이드교의 승려들을 끌어넣는다. (234p)>

<술에 영광이 있을진저! ‘눈크 테, 바케, 카남!(바쿠스여, 우리 이제 그대를 찬송하노라!)’ (248p)>     

본문 중 ‘켕케식 등’이라는 표현이 있어 무엇인지 찾아보았더니 의외였다. 1784년 스위스의 에메 아르강이라는 학자가 지금까지도 많이 쓰이는 심지에 유리를 씌운 형식의 램프를 개발했는데 프랑스 친구였던 켕케가 이 아이디어를 빼내 먼저 램프를 완성시켰고 그래서 등 이름이 켕케식 등(혹은 램프)가 됐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책 제목이 왜 <레미제라블>인지 자연스럽게 떠올려졌다.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사는 삶, 그 다양한 삶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인권의식이며 인간의 존엄성이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던 시대,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 비참하다. 그런 비참함을 보고 느끼며 함께 아파 하는 사람에 대한,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문득 문득 비추인다. 작가의 따뜻한 눈물과 한숨과 위로가 한번에 느껴진다.     

<그는 그런 걸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절망한 사람들은 제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악운이 뒤에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120p)>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는 이 집의 하녀가 되었다. 다섯 살에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호, 슬프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 세상의 고통은 몇 살에든지 시작된다. (284p)>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법칙은 우리의 문명을 지배하지만, 아직도 우리 문명에 침투하지 못하고 있다. 노예 제도는 유럽 문명에서 소멸됐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것은 항상 존재하지만, 이제는 여자만을 짓누르는데, 그것을 매음이라 부른다. (335p)>     

<두 시간도 채 못 가서 그가 베푼 선행은 모조리 잊혔고, 그는 이제 그저 ‘전과자’일 뿐이었다. (5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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