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결혼 10년 만에 처음 '김장'이라는 걸 했다. 그땐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더니 요즘 꺼내먹으면 오잉? 먹을만하다. 그냥 김치냉장고에 묵혀뒀는데 정말 고맙게도 스스로 잘 익었다. 쏟은 정성을 생각하면 이 맛도 내가 기대한 '그 맛'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먹을만하다.
아침에 강의 자료를 준비하다가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직장을 옮기면서 웬만한 자료들은 후배들에게 다 넘겼는데 아직 내 책장에 남아있었다. 기특한 일이다.
나는 자료를 정리하는 데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 덕분에 퇴사하면서 스프링 제본까지 탈탈 털렸는데 이 책은 나름 고가의 양장 커버를 두르고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사실 이 책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내 주변에는 딱히 이 책을 탐낼만한 사람이 없어서였다. 대체 영어 강사가 '우리말 글쓰기 표현사전'을 어디에 써먹겠는가 말이다.
책장 메인에 있다가 귀퉁이로 밀려난 것도 서러울 텐데 심지어 저렇게 구석에서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글쓰기 표현 사전
*집필의 목적
모의고사 듣기문항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18~20번, 글의목적, 심경, 분위기 문항분석에 참고했던 기억이 난다.
*강조를 위한 배열
40번대 오답률이 높은 3점 문항, 문장배열을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일부 내용은 글쓰는 사람들보다는 제대로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더 쓸모가 있겠다 싶었다.
*재미로움으로의 설득
주제문 찾기는 난도가 낮은 문항이 많아서 학생들이 만만하게 본다. 이런 얘기를 할 때 인용했던 것 같다.
쓸 줄 모르면 읽을 줄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쓰지도 않고 읽는 법을 가르친다는 게참 아이러니하지만 강사들은 대개 충분히 읽고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똥차게 알아듣는 수강생들에게 감사할 따름.
나는 참 늘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한다.
이념이니 투쟁이니 그런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면서 4년 내내 야학에서 일했다. 그냥 좋아서. 동기들이고 선배들이고 다들 말렸는데도 했다.
공채로 입사한 첫 직장에서는 렌터카팀을 부흥?시키겠다며 정비사분들과 거품 물고 세차를 했다. 회사에서도 말렸는데 그냥 했다. 그것도 그냥 좋아서 그랬다.
학원 강의를 할때는 나름 인기가 좋은 편이었는데, 애들한테는 뻘짓하면 죽인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정작나는 국어강사도 안 읽을 '글쓰기 표현사전'을 읽었다.
다들 대~단한 뻘짓이라고 할 때도 나는 좋았다.
나는 늘 그랬다. 시키면 하기 싫고 말리면 오기가 났다.
그래서 골라 하는 일들마다 돌아보니 뻘짓이다.
그러다 갑자기.
뻘짓이 관성이 된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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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책장을 몇 장 넘겨보니마치 6년 전에 미리 사 둔 책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내게 쏙쏙 와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