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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진 코치 May 30. 2020

6년묵은 뻘짓거리

뻘짓도 정성을 들이면, 반드시 써먹을 날이 온다.

작년 겨울, 결혼 10년 만에 처음 '김장'이라는 걸 했다. 그땐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더니 요즘 꺼내먹으면 오잉? 먹을만하다. 그냥 김치냉장고에 묵혀뒀는데 정말 고맙게도 스스로 잘 익었다. 쏟은 정성을 생각하면 이 맛도 내가 기대한 '그 맛'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먹을만하다.


아침에 강의 자료를 준비하다가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직장을 옮기면서 웬만한 자료들은 후배들에게 다 넘겼는데 아직 내 책장에 남아있었다. 기특한 일이다.


나는 자료를 정리하는 데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 덕분에 퇴사하면서 스프링 제본까지 탈탈 털렸는데 이 책은 나름 고가의 양장 커버를 두르고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사실 이 책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내 주변에는 딱히 이 책을 탐낼만한 사람이 없어서였다. 대체 영어 강사가 '우리말 글쓰기 표현사전'을 어디에 써먹겠는가 말이다.


책장 메인에 있다가 귀퉁이로 밀려난 것도 서러울 텐데 심지어 저렇게 구석에서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글쓰기 표현 사전


*집필의 목적

모의고사 듣기문항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18~20번, 글의 목적, 심경, 분위기 문항분석에 참고했던 기억이 난다.


*강조를 위한 배열

40번대 오답률이 높은 3점 문항, 문장배열을 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일부 내용은 글쓰는 사람들보다는 제대로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더 쓸모가 있겠다 싶었다.


*재미로움으로의 설득

주제문 찾기는 난도가 낮은 문항이 많아서 학생들이 만만하게 본다. 이런 얘기를 할 때 인용했던 것 같다.


쓸 줄 모르면 읽을 줄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쓰지도 않고 읽는 법을 가르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강사들은 대개 충분히 읽고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똥차게 알아듣는 수강생들에게 감사할 따름.



나는 참
늘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한다.



이념이니 투쟁이니 그런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면서 4년 내내 야학에서 일했다.
그냥 좋아서. 동기들이고 선배들이고 다들 말렸는데도 했다.


공채로 입사한 첫 직장에서는 렌터카팀을 부흥?시키겠다며 정비사분들과 거품 물고 세차를 했다.
회사에서도 말렸는데 그냥 했다. 그것도 그냥 좋아서 그랬다.


학원 강의를 할때는 나름 인기가 좋은 편이었는데, 애들한테는 뻘짓하면 죽인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정작 나는 국어강사도 안 읽을 '글쓰기 표현사전'을 읽었다.

다들 대~단한 뻘짓이라고 할 때도 나는 좋았다.


나는 늘 그랬다. 시키면 하기 싫고 말리면 오기가 났다.

그래서 골라 하는 일들마다 돌아보니 뻘짓이다.

그러다 갑자기.


뻘짓이 관성이 된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

.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몇 장 넘겨보니 마치 6년 전에 미리 사 둔 책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내게 쏙쏙 와 박힌다.


뻘짓도 정성을 들이면 분명히 써먹을 날이 온다.

예상한 '그 맛'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먹을만하게 익는 날이 온다는 건 안다.


# 김치냉장고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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