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감정_수동공격성_채 부장의 살신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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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화가 치미는 순간이 있다. 불의를 보거나 위협을 당할 때 혹은 부당한 일에 휘말리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크게 기대한 일에서 실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다른 감정을 숨기느라 '화'를 내기도 한다. 사소한 것에 집착했던 소심함을 숨기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고, 겁많은 강아지가 크게 짖는 것처럼 두렵고 겁이 날 때마다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혹은 슬프거나 놀랐거나 실망했을 때, 시기,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모두 ‘화’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숨기고 싶은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려고 할 때 사람은 비겁해진다.
P그룹 기획실 채 부장은 신입 사원들에게 ‘독화살’로 통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채 부장의 독화살은 늘 젊은 여직원을 향한다는 점이다. 신입직원을 직접 교육하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불러세워서 하루 종일 목에 핏대를 올린다. 그리고는 특별히 시간을 쪼개서 피드백을 해 주었는데도 눈곱만큼도 나아지는 게 없다며, 여우같이 눈치나 보는데 일을 제대로 하겠냐며 책상을 몇 번씩이나 내려친다. 몇 해 전부터 똑같은 레퍼토리로 분통을 터트리는 채 부장의 대사를 듣고는 모두가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입을 모아 수군거린다.
채 부장의 '살신성인' 피드백은 어떤가? 동료들의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로 보아 자신은 단 한 순간도 누군가를 부당하게 괴롭혔다고 생각한 적은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본인도 퇴근 시간을 미뤄가며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살신성인이라고 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채 부장은 앞으로도 신입사원이 입사 할 때마다 어떤 이유로든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 분명하다. 이렇듯 수치심, 두려움, 슬픔, 놀람, 실망, 시기, 질투는 서로 전혀 다른 감정이지만,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화’로 뭉뚱그려 놓으면 영영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가 없다.
반면 출근 직후부터 퇴근 직전까지 시달린 신입 사원은 어땠을까? 그녀는 언젠가부터 기획팀과 관련한 업무만 깜빡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잦아졌다. 채 부장은 일부러 약 올리는 거냐며 전보다 더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지만 신입사원의 이런 어이없는 실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수동공격적 성향’이라고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분풀이하는 대신 상대방이 곤란을 겪을만한 소심한 복수로 맞받아치는 것이다. 이때 ‘수동 공격자’는 반복되는 실수에 자책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업무개선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간혹 이러한 ‘수동공격성’은 당사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일어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동정을 사거나 반대로 고단수 사이코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이들에게는 이같은 ‘화’의 소극적인 표현이 ‘소심한 복수’인 셈이다.
우리 속담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다. 뒤가 구린 행동을 하고는 들킬까 봐 지레 큰소리를 치는 상황이다. 이렇듯 불편한 감정을 감추려고 꾸며낸 거짓 ‘화’에는 실체가 없지만 막상 화를 내는 사람들은 불편한 상황이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화풀이 대상에서 핑곗거리를 찾는다. 엉뚱한 데서 꼬투리를 잡으려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공감받지 못한 화는 짜증으로 전락하고 이때 사람들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느냐’라는 생각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이런 상황은 ‘화’가 터져 나올 때의 속 시원한 기분과 맞물려서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힘을 얻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화’를 낼때 몸 안에서 권력과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테스토스테론’이 다량 분출된다(Lewis, M., Ramsay, D. S., & Sullivan, M. W. ,2006). 이런 무서운 화(火) 사이클에 갇힌 사람들은 ‘무서운 똥’이 되어 계속 화를 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다들 왜 이 모양이야!
불편한 느낌이 들 때마다 외부로 책임을 떠넘기며 화내는 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자기 감정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다. 소위 ‘무슨 말만 하면 화내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본인은 그 순간 남 탓을 하면서 안도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지금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면전에서는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 줄지 모르지만, 남 탓은 부메랑이 되어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방귀 뀐 놈이 성을 낼 때 지독한 냄새와 분노 폭탄을 참아가며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려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감정을 표현하는 이유는 단지 버럭 화를 내어 난처한 순간을 모면하거나 분을 토해내서 속이 후련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서로의 생각을 제대로 알고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건강한 관계를 위한 '건강한 화'의 핵심은 ‘솔직해지는 용기’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하느라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자기 생각만 하면서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감정에 먼저 솔직해져야 한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이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대로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화’라고 착각했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도 주변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얼마 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이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남자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혼한 뒤에도 아이와 놀아주느라 3년째 주말마다 아내를 만나고 있는데, 매번 아내에게 화가 난다는 것이다. 3주도 아니고 3년을 매주 만나왔다니 아이 핑계 대지 말고 아내에 대한 본인의 마음은 어떤지 솔직히 말해보라고 스님이 물었다. 우물쭈물하던 남편은 그제야 그만한 아내도 없었다고 모기소리를 낸다. 3년째 매주 만나며 여전히 서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는 부부는 카터 박사의 말처럼 서로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차라리 한쪽에서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사실은 그동안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그런데 당신이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니 섭섭하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수백 명이 앉아있는 강당에서 모기소리는 낼 수 있어도 단 한 사람, 꼭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그 사람 앞에서 솔직해지기란 정말 어렵다. 이때 필요한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