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 Self Compassion
유년기의 S는 자신을 ‘건강한 나르시시스트’라고 믿었다. 그녀를 묘사할만한 다른 표현이라면 구김살 없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어떤 말이라도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나름대로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그녀는 조금씩 달라졌다. 눈치가 빤한 사회 초년생이 되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항상 골몰하더니 언제부터인가 늘 부족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민끝에 자존감 워크숍에 참석해보기로 했다. 워크숍의 하이라이트는 ‘칭찬 샤워’ 라는 코너였는데, 각자 듣고 싶은 말을 종이에 적은 후 바구니에 넣으면 참가자들이 한 사람씩 동그랗게 에워싸고 바구니에서 종이를 꺼내서 거기에 적힌 문장을 크게 읽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사랑해!” “최고야!” “정말 멋져요!” 참가자들이 한 마디씩 칭찬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아이.. 아닌데..’,‘난 아직 멀었는데..’ 하는 더 큰 목소리가 들렸다. 진행자의 입장이 난처해질까봐 꾸역꾸역 순서를 마치고 그녀는 자리로 돌아갔다. 진행자가 소감을 물었을 때, 그녀는 모든 참가자가 다 듣도록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야 했다. 그러고는 기어이 모두에게 박수를 받고 대표로 선서까지 낭독했다.
나는 이제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를 따라서 모두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선서문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실망감에 더해 ‘앞으로는 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새로운 강박증을 안고 생활관을 나왔다. 그날 밤, 그녀는 악당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는 악몽을 꾸었다. 한참을 낑낑거리다 겨우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책상에는 ‘00아 사랑해.’ ‘00이 좋아.’라는 문장이 적힌 색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종이와 콩 단추, 실타래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자존감 워크숍’에서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양어깨를 감싸 쥐고 토닥거려도 봤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다시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매일 밤 자신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남들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썼지만 한 번도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한가?
심리학에서는 최근 자존감의 역기능적 측면의 대안으로써 불교의 연민(compassion)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불교에서는 존재에 대한 이타적인 마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말하는데, 미국 하버드 의대의 임상심리전문가인 크리스토퍼 거머(Christopher K. Germer)와 텍사스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는 이러한 ‘연민’의 개념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기연민 (self-compassion)’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자기친절’, 자신의 고통을 누구나 겪는 것으로 수용하는 ‘보편적 인간성’, 자신의 경험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는 ‘마음 챙김’으로 이루어진다. 자존감이 스스로 특별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자기연민은 오히려 보편적인 인간성에 집중한다. 우리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지 않아도 충분히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동정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작년 이맘때쯤 ‘아침형 인간’을 ‘강박증 환자’로 몰아세우던 명상가에게 깜빡 속아서 늦잠 자기를 계획했던 적이 있다. 나는 틀림없는 ‘아침형 인간’이면서 억지로 늦잠을 자는 것이 나를 돌보는 것이라고 믿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말처럼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건, ‘죽어도 떡볶이는 먹고 죽겠다’고 다짐을 하건, 자신을 사랑하는 형태는 각자 다르다. 나른한 봄날 낮잠을 자거나 실수해도 괜찮다고 마냥 토닥이는 것만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아니다. 가끔은 내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밀어붙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혼자서 우쭐한 기분이 들 때까지 자화자찬을 늘어놓아도 좋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방식은 달라지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로 통한다. 나를 온전히 위하는 마음, 사랑의 다른 말은 ‘연민’이다.
다음은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가 제시한 자기연민self-compassion 점검을 위한 세부항목이다.
나는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를 쓴다.
나는 힘든 시기를 겪을 때, 내게 필요한 돌봄과 부드러움으로 나를 대한다.
나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나는 나 자신의 결점과 부족함에 대해 관대하다.
내 성격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이해하고 견디어 내려고 한다
나는 나 자신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비난하는 편이다.
나는 정말로 힘들 때는, 나 자신을 더욱 모질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내 성격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견디거나 참기 어렵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나 자신의 어떤 면들을 보면, 자신을 비난한다.
나는 고통을 겪을 때는 나 자신에게 약간 냉담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겪는 어려움은 모든 사람이 겪는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여긴다.
나는 마음이 갈팡질팡할 때, 세상에는 나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겪은 실패들에 대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로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 부족한 점을 생각하면, 세상과 단절되고 동떨어진 기분이 든다.
나는 힘들 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행복할 거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가 힘들 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마음 편하게 지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중요한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나 혼자만 실패한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화가 날 때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뭔가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그 상황을 가급적 여러 가지 각도로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기분이 처질 때면 열린 마음으로 내 감정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우울할 때, 잘못된 모든 일을 강박적으로 떠올리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중요한 일에 실패하면,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는 어떤 일로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날 때, 내 감정에 휩싸이는 경향이 있다.
나는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듯 나를 위로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친절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늘 자신을 비난하고 다그친다면 아무리 훌륭한 심리 상담사를 만나고 sns 상태표시줄에 ‘오늘 왠지 울적함’ 이라고 호소해도 힘이 되는 위로를 얻기는 어렵다. 진정한 공감과 위로는 ‘나에게도 친절하기’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공감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마음으로 기억해두면 힘든 상황에 놓인 누군가에게도 같은 것을 나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