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EBS 인기 캐릭터 펭수가 방송에서 한 말이 화제가 되었다. ‘힘내라면 힘이 나나요?’ 그의 한마디는 마치 그동안 영혼 없는 위로에 실망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누군가는 동료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내심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나아서 다행이다.’ 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내라’, ‘할 수 있다’는 명령 같은 구호로 묘한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감이 껌딱지처럼 바닥에 들러붙은 사람들에게 이런 멘트는 다시 힘을 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끔은 혼자 일어서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워 당장 일으켜세우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고, 수없이 망설이다 건넨 위로의 말이 매몰차게 거절당할 때도 있다. 선뜻 돕지는 못하고 겨우 말이라도 건넸는데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는 차라리 말하지 말 걸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려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안타깝게 지켜보는 시간을 감내하는 것도 아끼는 사람을 위한 마음이다. 이 때 답답한 내 마음만 생각해서 상대방을 다그치면 ‘너를 생각해서’ 라는 말이 핑계로 전락해 버린다.
힘내라면 힘이 나나요?
밀란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는 여자로서 매력을 잃어간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기에 안타까웠던 그녀의 연인이 익명의 편지로 사랑 고백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활력을 되찾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일어나게 한 것이다. 지나치면 ‘관심종자’의 오명을 얻게 되지만, 가끔은 이렇게 타인으로부터의 애정과 관심이 자존감의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이 때 그녀의 연인은 무작정 옳은 말을 늘어놓는 대신에 그녀가 일어서는데 도움이 될 만한 수 많은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힘내라는 말대신 익명의 연애편지를 써서 그녀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돌아보게 했다. 자존감은 언뜻 들으면 혼자서 지켜내야 하는 것 같지만 마음이 지쳐서 스스로 일어서기 힘든 때는 누군가의 지지와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L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결혼 전에는 헤어지자는 협박으로 자백을 받아내곤 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결혼한 후부터 애매한 분위기에서는 늘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남편의 뽀얀 피부와 상냥한 말투는 분명 강남 스타일인데 표현이 항상 서툴다. 이런 표현 방식이 그가 영락없는 경상도 싸나이임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누구나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동료들 앞에서 우연을 가장하여 아내 자랑을 하고 때마다 아내에게 손편지를 쓴다. 말로는 못 하면서 글로는 ‘사랑한다’고 적는다. 결혼 전에는 늘 만성적인 우울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남편을 만난 후부터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인지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심리상담사가 정교한 프로세스로 아무리 훌륭하게 상담을 했더라도 진료비를 정산하는 순간 현실과는 분리된다. 하물며 영혼 없이 그럴듯한 응원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상대의 절망에서 한 발 떨어져 안도하는 동정심이 어떤 안정감을 줄 수 있을까?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진심일 때 비로소 마음을 담은 말과 행동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진심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다. 투박하고 서툴러도 진심이 느껴지는 관계에서 우리는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럴듯한 말을 유창하게 풀어내거나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지 않아도 좋다. 곁에서 온 마음으로 변함없이 지지하는 모습만으로 상대방은 조금씩 일어설 힘을 얻는다. '나다움’을 스스로 지켜내기 벅찬 사람에게 ‘당신다움’을 알려주는 통로는 다름아닌 따뜻한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