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말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살고 싶어."
"왜? 그 집이 그렇게 좋았나? 기다란 복도가 컴컴하다고 너 무서워하지 않았니?"
"거긴 내 추억이 있어. 여긴 아무것도 없어. 여긴 그냥 잠자는 곳이야."
우리는 이 집에 1년 전쯤 이사 왔다. 학교도 가까워지고, 중심 상가도 훨씬 가까워져 생활하기 더 편리해졌다. 집 구조도 훨씬 안정적이다. 그런데 아이는 이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잠을 자는 게 거의 전부이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가서 점심, 저녁을 밖에서 먹고 밤 12시쯤에 돌아와 자고 다시 아침에 일어나 나가기를 반복한다. 일 년을 그렇게 살았다. 주말도, 방학도.
그런 아들에게 이 집은 가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정이 아니라 잠을 자기 위해 잠시 머무는 정류장 같은 곳이다. 건축가이자 작가인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이 도시도 우리 아이가 말하는 추억이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1년 내내 비슷하게 생긴 아파트라는 사각형 구조물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갇힌 듯 산다. 밖으로 나올 때도 지하주차장을 통해 자동차로 또 다른 사각형 구조물인 마트, 회사, 학교 등으로 이동한다. 하루 24시간, 일년 열두 달의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바깥을 통하지 않고 차와 엘리베이터 등의 이동공간을 통해서 이동한다.
바깥은 자동차가 이동하는 창밖의 공간일 뿐 더 이상 삶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자연과 환경의 부재로 도시에서는 쌓일만한 추억은 없다. 우리 아이에게 이 집이 아무런 추억이 쌓이지 않는 것처럼. 예전 어른들은 고향을 떠나 살면 어릴 적 그 고향을 그리워했다. 어릴 때 놀던 개울가, 그 옆의 들꽃과 강아지풀. 골목길을 돌면 나오는 전봇대와 그 옆 구멍가게. 모두 집이 아닌 골목길과 주변 환경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런 풍경을 가진 추억이 있을까?
유현준 작가는 말한다. 도시는 자동차에게 점령당해서 더 이상 걷고 싶은 공간이 아니라고. 각각의 생활공간은 점과 같은 섬이 되어 분리되고, 길은 자동차의 통로일 뿐 걸어다니는 길의 추억은 사라졌다고. 그렇게 아파트, 엘리베이터, 지하주차장,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이 자연이 숨 쉬는 길을 인간에게서 빼앗았다고. 그래서 24시간, 365일 변하지 않는 인공물에 갇힌 인간은 변화하는 자연, 숨쉬는 자연, 생동하는 자연을 대신할 본능적 갈망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미디어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그래서일까? 나는 걷는 것에 지독히도 매달리게 되었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의 변화에 눈이 가게 된다. 그것이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 마음이 살짝살짝 일렁이는 이 느낌이 좋다. 어떨 때는 지난 봄 벚꽃나무의 열병식처럼 황홀한 것이기도 하고, 요즘은 아파트 울타리를 따라 핀 커다란 장미꽃의 합창을 듣는 벅차오름일 때도 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과 촉감, 기온의 변화, 강물의 높이,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처럼 미세한 변화가 더 내 마음을 흔들 때가 많다. 조금씩 변화하는 자연 속을 걷는 나는 자연의 움직임과 함께 하는 느낌에서 내가 자연이 되고, 그 속에서 나의 생명을 파르르 느낀다. 우리집 어느 방, 어느 거실에서는 느낄 수 없다. 비록 화초를 갖다 놓는대도 조형물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은 못 견뎌한다. 아무리 좋은 음악을 듣거나,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를 보며 걸어도 그 끊임없는 제자리걸음과 그 변함없는 반복의 답답함을 견딜 수가 없다. 산책로는 다르다. 산책로를 걸으면 공기의 흐름이 얼굴에 닿고, 그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텔레비전 모니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모니터에는 각종 구름과 노을과 새의 군무가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하지만 산책로가 진정 나의 집이 되는 순간은 내가 이어폰을 낄 때이다. 이어폰을 내 귀에 꽂으면 여러 사람이 오고 가는 이 번잡한 산책로가 오로지 나의 집이 된다. 이어폰을 끼는 그 순간, 주변의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모니터 속의 배경이 되고, 나는 우리 집 소파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자연이라는 모니터를 보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평온한 기분이 들면서 산책에 몰입한다. 거기다 걸으며 느껴지는 정체되지 않은 흐르는 공기의 맛은 나의 자연 모니터가 첨단 4G 시스템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다 어제와 다른 초록잎들이 길가에서 조금씩 물들며 내가 자연에 있음을 알려주면 나는 순간순간 자연의 집과 자연의 바깥을 넘나들며 내 존재를 느낀다. 자궁 속 태아처럼 평화롭게.
아들에게 1년 전까지 살던 그 집은 매일이 달랐다. 하루는 친구들이 놀러 오고, 하루는 뒹굴뒹굴 텔레비전을 보고, 하루는 가족들과 게임이나 놀이를 즐겼다. 그 집은 잠시 바깥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편안함을 안겨주는 아들의 마음속 고향이었다. 하지만 이젠 잠시 밤에 들렀다가 눈을 뜨면 다시 나가야 함을 일깨워주는 표정 없는 삭막한 공간이 되었다. 현대인들도 그렇지 않을까? 차를 타고 스치듯 지나가는 가로수를 제외하면 자연을 느낄 수 없는 똑같은 회색 빌딩과 자동차 속에 갇혀 사는 우리의 변치 않는 1년 열두 달. 그 변함없음을 견디지 못해 몇 초 단위로 변하는 미디어를 보며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며 심신의 위안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계절이 없는 콘크리트 도시에 사는 나의 고향은 이 산책로이다. 어제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공기의 방향이 어제와 다르고 바람의 세기가 시간마다 다르다. 물새의 종류와 수가 지난달과 다르다. 풀잎의 흔들림이 방금 전과 다르다. 내가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미세한 변화가 나의 살아있음을 내 감각에게 일깨우며 내 심신을 위로해 준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나의 집을 찾아갈 것이다. 회색빛 이 아파트보다 더 편안한 그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