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책을 나왔다. 산책을 하면 자연의 변화를 시시각각 느낄 수 있어 좋다. 요즘은 하늘, 구름, 나무, 풀, 강물, 꽃 모두가 가을이라는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멋진 연주자들이다. 오늘도 나는 낙엽 양탄자로 된 객석에서 가을의 변주에 감동하며 나의 마음속 복잡한 퍼즐을 이리저리 맞추어 보고 있었다.
한낮의 산책 길이라 햇살은 제법 따가웠지만, 기온과 바람은 딱 좋았다. 오른쪽 산책로 끝까지 걸어갈 때만 해도 말이다.
그 가벼운 마음 그대로 내가 걸어왔던 방향, 그러니까 왼쪽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여긴 어디?
분명 내가 걸어왔던 그 길인데, 바람의 강도가 달랐다. 내 얼굴과 온몸으로 달려드는 바람의 우악스러움에 내 모자는 견디지 못하고 날아갈 지경이었다. 나는 모자가 벗겨질까, 손으로 모자를 꼭 쥐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가을의 연주를 감상하는 행복한 관객에서 가을의 폭풍을 만난 불편한 행인일 뿐이다. 모자를 벗을 순 없었다. 머리를 감지도 않았고 묶을 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모자를 벗으면 나는 이 바람 속을 부스스함을 강조한 산발의 머리 스타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내 앞에서 걸어올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아는 이를 마주친다면 서로 아는 체 해야 하나 마나를 고민해야 할 난감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잡은 불편한 자세로 걸어갔고, 세찬 강바람은 도무지 멈출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걷기를 20여분, 나는 결국 세속의 외양에 얽매이는 걸 과감히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모자를 벗어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에게 달려들던 그 황소바람은 어느새 괄괄한 장난꾸러기 소년의 모습으로 약해졌다. 그러니까 모자를 쓰지 않으니 오히려 바람이 맞을만하였고, 머리에 진 무거운 짐을 벗은 듯 불편하던 몸도 가벼워진 것이다. 그렇게 왼쪽 길을 다 걷고 다시 돌아서니, 아까 그 센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등을 가볍고 밀어주는 보들보들한 바람으로 또 바뀌었다. 이렇게 걷는 방향에 따라, 모자에 따라 세기와 느낌이 다를 줄이야.
순간 머리 속 퍼즐 조각이 반짝거리더니, 문득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라는 바람도 그렇지 않을까?
항상 우리 곁에서 불고 있지만, 그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10년 단위로 찾아오는 나이의 마디들. 30, 40, 50... 이렇게 각 나이의 출발점에 서면 갑자기 시간의 바람이 거세게 느껴지고 그 바람을 이겨보고자 모자를 움켜쥐듯 뭔가를 찾고자 애를 쓴다.
서른 살이 되던 때, 내 주변 친구들이 모두 결혼 해 버리고 혼자 남은 듯한 허전함에 맞선과 소개팅을 가리지 않고 보며 계속 누군가를 만났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해에는 뭔가 성장,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서 어린 아들을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대학원에 덜컥 입학해 버렸다. 그리고 쉰을 앞둔 지금, 나는 내 삶에 대한 허무함을 극복하고자 이렇게 글 나부랭이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간의 바람이 나에게 불어닥칠 때마다 나는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에 모자를 움켜쥐듯, 어떤 불안함에 뭔가에 매달렸다. 영화 속 대사처럼 '뭣이 중하지'도 모르고 그저 무엇이든 나의 텅 빈 가슴을 채워주기만 하면 될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사실, 시간의 바람은 계속 불어왔고 몸을 살짝 돌려보면 그렇게 세찬 바람도 아닌데, 그저 바람이 싫어서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움켜쥐니 그 바람은 더 내 심장을 후벼 파듯 매섭게 불어왔던 것이다. 그저 모자를 벗고 고개를 들고 바람을 맞았더라면, 바람은 그저 내 주위를 가볍게 불고 있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말이다.
10년 뒤 이순이 되면, 그 이름처럼 귀에 들리는 대로 순응하고 이해하는 '나'이길 바란다. 그래서, 내 마음의 평안을 찾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길. 시간의 바람에 과거의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남에게 인정받는 내가 되고자 모자를 움켜쥐듯, 뭔가에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