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산책길 이야기
내가 처음 영어를 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영어수업 시간이었다. 요즘처럼 선행 학습도 없고 초등학교 때 영어 교과도 없었으니 내 또래 중 다수가 그때 영어를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영어를 배운 지 한 1년쯤 되었을까, 나는 아주 낯선 숙어를 배우게 되었다.
take a walk [산책하다]
그때 나는 [산책하다]라는 우리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산책? 그냥 걷는 것? 그런 걸 왜 하지?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을?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나만 어색해하는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이 중요한 숙어를 열심히 외웠으니까.
1980년대 당시에 나는 주변에서 한 번도 산책한다는 사람을 보거나 이 말을 쓰는 경우를 듣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2018년을 지나는 나의 중년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 산책이란 것을 하며 산다. 요즘처럼 폭염이 연일 계속될 때에도 이 산책을 거르지 못하고 나선다. 그러면 더운 공기는 시원한 강바람에 조금 옅어지지만, 그 습함은 도저히 견디기 쉽지 않다. 그래도 기다랗게 난 초록색 우레탄 길을 가볍게 걷다 보면 머릿속 복잡한 심상은 어느새 빠져나가고 상쾌한 공기와 자연의 풀빛들이 이를 대신해 채워지는 느낌이다.
내가 처음 산책을 시작했던 것이 17년 전쯤, 아기를 낳고 1~2년 뒤 무거워진 내 몸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내가 사는 아파트 옆 학교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면서 였다. 그때는 살을 빼고자 하는 마음에 제법 속도를 내어 뛰기도 하고 힘들면 걷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걷기가 하나의 노동처럼 힘겨웠었다. 그래서 주변의 헬스클럽을 찾아 러닝머신을 타기도 하였다. 그 전에도 러닝머신은 해 보았으나 그 당시 어느 날 문득 벨트가 돌아가는 기계 위에서 걷고 뛰는 나 자신이 갇힌 공간 안에서 헐떡이며 훈련받는 동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것도 오래 하지 못하고 주어진 몸무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육아와 생활에 치이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지금 내가 사는 부산 명지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낙동강 하구의 끝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철새가 날아드는 철새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이 곳에 10년 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해안산책로가 만들어졌고, 그때 듬성듬성 심었던 풀과 나무들이 지금은 제법 보기 좋게 자라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 이 길을 봄에 걸으면 노란 병아리 같은 개나리, 그리고 하얀색 솜털 같은 벚꽃을 차례로 만나고, 여름이 되면 푸르른 해송과 간들간들한 강아지 풀의 손짓을 볼 수 있다.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 꽃잎이 강바람에 흔들리며 나를 맞이해 주고, 겨울에는 철새들의 화려한 군무를 볼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더위 때문에 저녁 산책을 하다 보면 붉은빛이 도는 슈퍼문이 강 건너편에서 장관을 만들기도 한다.
이 길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기 좋은 속도로 걷는 것을 즐기는 요즘, 나에게 산책은 운동이기 전에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연의 위안을 받는 힐링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바람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번 주도 수고 많았다고 말해주고, 풀꽃들은 잘 지냈냐며 내게 손을 내밀어 준다. 강물은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잘 살고 있다고 걱정마라고 말해 주고, 큰 달은 말없는 미소로 나를 응원해 주는 것이다. 크고 작은 철새들은 개구쟁이처럼 내 옆을 어지러이 지나가며 즐거운 산책의 동무가 되어 준다. 그렇게 일상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이 산책 코스가 나에게는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해외의 풍경이나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보다 더 힘을 주는 위안이자 휴식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취미는 'take a walk'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