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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06. 2019

외조형 남편 vs 내조형 남편

남편의 이중성마저 사랑할 수 있을까?

"남편분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외조를 잘해주는지 부러워요! 우리 남편한테는 언강생심 말도 못 꺼내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매일 늦게 퇴근하던 남편이 그날만은 나를 위해 칼퇴근을 하고 창원에서 부산의 pc방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그리고 고픈 배를 부여잡고 2시간 동안 전쟁 같은 티켓팅을 함께 했던 우리 남편의 외조는 분명 남다른 편이다.  7시 59분 59초에 정확히 클릭을 했지만 하얗게 변해버린 모니터를 바라보며 이성을 잃은 내가 새로고침을 연타하고 있을 때, 남편은 먹잇감을 노리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처럼 모니터 정면을 묵묵히 응시하며 타이밍을 노 비록 하느님석이라 불리는 3층이긴 하나 2장의 티켓이라는 승전보를 울렸다. 내가 그 승전보를 카톡으로 그녀들에게 전하자 그녀들은 나에게 남편에 대한 찬양가를 답례 삼아 뜨겁게 올다.


   3명이 매달렸던 방탄소년단 티켓팅에 우리 모두 그렇게 실패하였지만,  1시간을 달려 퇴근한 남편이 나에게 5분 동안 설명을 듣고 처음 해본 티켓팅에서 당당히 2개의 티켓을 내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3명의 아미단은 꿈꾸었던 서울행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항상 다정다감할 것 같은 남편은 에서는 어이게도 봉건 군주가 된다.  퇴근 후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고 저녁 준비에 바쁜 나를 못 본 척  집에 들어온 남편은 '밥 먹으러 오세요'를 외칠 때까지 안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또 밥을 먹은 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방 또는 거실로 직행한다.  내가 설거지를 겨우 끝내고 소파에 엉덩이를 대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커피'를 외친다.  주말에 밀렸던 청소를 하느라 내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용을 쓰고 있어도 남편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들이 '아빠는 왜 엄마를 안 도와?'라고 말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엄마는 가족을 위해 이런 일을 해 주는 걸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내가 그 기쁨을 뺏을 수 없지'라고 뻔뻔하게 말한다.  

  " 아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도 함께 해주는 걸 더 좋아해"

라고 아무리 외쳐도 못 들은 척하며 '자기가 타 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어.  커피 한 잔 더 하자' 안방으로 도망간다.


 내 생일만큼은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싶다는 나의 말에 결혼 후 나의 첫 생일날,  남편은 슈퍼에서 <3분 미역국>사서는 봉지째 그대로 식탁 위에 올려놓고  하니 출근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는 그날 그 <3분 미역국>을 봉지째 쓰레기통에 버렸고 그날 저녁 일명 미역국 대전으로 불리는 첫 부부싸움이 있었다.)  그 후로 내 생일날이 되면 남편은 아들과 끙끙대며 미역국을 끓인다.  비록 내가 미리 장을 다 봐놓고 옆에서 레시피를 불러줘야 해서 더 피곤하지만.   


  물론 남편이 아주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다.  명절에 튀김과 전을 하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그리고 제삿날 쌓인 엄청난 뒷설거지도 남편이 한다.  그리고 빨래 널 때 옆에서 털어주는 것, 청소기 세팅을 다 해 놓고 손에 쥐어주면 청소기 돌리는 것 등을 해 낸다.  그리고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대부분 군말 없이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누이들을 만나면 남편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쉬며 하소연을 한다. 그러면 4명의 시누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가며 남편을 혼낸다.

 " 집에 있는 우리도 남편이 너보다는 많이 도와준다.  올케가 얼마나 힘들겠니. 좀 같이 해라."

 " 똑같이 바깥일 하면서 너 왜 그러니?  너보다 나이 많은 자형도 너보다는 는데. "  

시누이들의 말뿐인 혼냄이지만 쩔쩔매는 남편을 나는 고소해다.


  한 때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던 나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이처럼 아주 이중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남편에게 불만이 크다.  다른 집 남편들은 아내가 고생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라도 도와준다는데, (도와준다는 표현에 대해서 나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이렇게 표현하겠다.) 이러한 남편의 집안일 거부는 나에 대한 남편의 애정도가 상당히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실 섭섭하다.


  하지만 러한 문제적 남편을 내가 이해할 만한 이유는 앞서 말했던 남편의 세심한 외조와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 되면 집이나 직장으로 꽃바구니를 배달시키는 깜짝쇼를 하고 어떤 미묘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가정의 분위기를 유쾌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이것이 단순 이벤트성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이다.  남편의 나에 대한 애정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그만의 방법으로 나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나는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이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편의 집안일 거부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그저 각자 잘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는 방향으로 그냥 두는 것이다.  


  '왜 그렇게 집안일 안 하는 거야?"

얼마 전 심통이 난 나의 말에 남편은 말한다.

 " 난 어릴 때 많이 해서 지금은 안 하고 싶어. 자기는 어릴 때 엄마가 다 해 줬으니 이제 많이 해야지."


 일찍 엄마를 여읜 남편 가끔 아이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남편은 따뜻하지만 현실적이며, 부드럽지만 까칠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 남편은 아들처럼 애교를 부린다. 내가 힘들어하면 도움이 되는 훌륭한 조언을 주는 인생 선배 같기도 하고, 내가 우울해하면 장난스러운 농담으로 나를 웃기기도 하는 남자 친구 같다. 뭔가 필요하다고 하면 생각한 것 이상 챙겨주는 인자한 아빠 같기도 다.  그래서 19년간의 힘겨루기의 결과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조형이 아니면 어떠랴.  각자의 색깔로 따뜻한 마음 전해지면 될 일이다.


  그래도 오늘 아침 나는 말하고 말았다.

"아, 정말. 오늘 나 피곤하니까, 커피는 좀 스스로 타 먹어."

그러면서도 내 손은 커피포트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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