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쿨한 게 싫다. 인간관계에서 미묘하게 불쾌하거나 찜찜할 때, 또 살짝 억울할 때 속 시원하게 따지고 싶고 화 내버리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웃어넘긴다. 왜? 속 시원하게 말해 버리면 그 순간에는 상대로부터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듯 하지만, 결국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오로지 홀로 괴로워할 나다. 어떻게 하면 속까지 쿨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끝까지 마음 편할 수 있을까? 가끔 상상한다. 속으로 하는 말, 밖으로 싹 다 내뱉어버리고 폭주하는 나를.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면, 머리를 흔들거나 내 머리를 세게 한 대 친다.
"정신 차려."
현실은 소파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아까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찌질이로 보이지 않으려 다시 쿨한 인간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회의시간.
크고 작은 의견들이 오간다. 나도 의견 위에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말을 보탠다. 돌아와서 생각하면 괜한 말, 과한 말 조각들이 내 머릿속 바다에 둥둥 떠 다닌다.
' 왜 그리 표현해 버렸을까?'
손을 휘이 저어 머릿속 망상들을 날려보지만, 금세 방울방울 떠오른다. 이럴 때 말은 하는 게 좋을까? 안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하면 쿨해 보일까?
학교의 긴 복도나 계단을 지나다 얼굴만 아는 정도의 누군가를 만난다. 원치 않더라도 한 방향으로 함께 걷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야 한다.
" 갑자기 추워졌죠?" "요즘 1학년 애들 어때요?"
머릿속에 맴돌다 만 말을 결국 꺼내지 못하고 어색한 인사로 대신하고 종종걸음으로 앞서 간다. 융통성 없는 갑갑한 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난 또 쿨하지 못했나? 하지만 굳이 할 말도 없는데 말해야 하나?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면 안 되나? 안 되겠지? 사회생활을 그따위로 하면 살기 피곤하겠지? 아니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만들어하는 것은 피곤하지 않나? 아냐, 그 어색함과 찝찝함을 감당하기 싫다면 자연스럽게 말을 걸자. 그게 맞겠지.
대외적으로 조용한 편이나 일에는 열정적이고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 속에 숨겨온 나의 사회 부적응적 자세를 이제야 고백하면 쿨하고 싶은 찌질함이라 명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유의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타협해 보려 한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자유의지]를 되뇌는 요즘 어느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그날도 얼른 양치를 하러 가려고 오전 중 쏟아진 메시지 확인에 급급하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웬일로 10살 아이들의 점심시간 교실 치고는 꽤나 고요하다. 소수의 아이들만이 교실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고 간간히 복도에서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소소한 환호성이 들렸다.
'녀석들. 사이좋게 잘 놀고 있구나.'
나는 안심하며 일을 마무리할 무렵 옆 반 선생님 목소리가 복도에서 조그맣게 들렸다.
"너희들, 그게 뭐니?"
" 핫팩이요."
살짝 오그라드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교실 문을 열어 보았다. 핫팩을 던지려는 동작을 취하던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쳤고 순간 얼음이 되었다가 자연스러운 척 앞의 아이에게 슬쩍 핫팩을 던졌다. 받은 아이도 나를 한 번 쳐다 보고 다시 다른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던졌다.
우리 반의 규칙 중에는 실내에서 물건을 던지는 놀이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있는데 아이들은 그 규칙을 어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를 중단시켜야 하는 기로에서 또 소심 해지며 내가 망설이는 순간 한 아이의 얼굴로 핫팩이 날아들었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교실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나는 또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 얘들아. 모든 아이들이 이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 '나 한 사람 안 지키면 어때'라는 마음이 들었니? 규칙 위반에 대해 스스로 망설여지는 사람 없었어?"
"아뇨. 저는 좀 망설였어요."
" 저는 그래서 안 하고 보기만 했어요."
몇몇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히 말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양심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
나는 거기까지만 말했어야 했다.
"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말이야. 자신의 양심이라는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따랐던 사람이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의 기준에 어긋나는 언행은 하지 않았어."
아이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귀를 기울였고 아이들의 관심에 괜스레 신이 난 나는 계속 말했다.
" 그래서 사람들이 칸트를 시험했지. 그럼 강도에게 쫓겨 온 친구가 너의 집에 숨었는데, 강도가 찾아와서 친구가 어디 있냐고 물어도 거짓말을 안 할 거냐고."
아이들은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며 소리소리 질렀다.
나는 말했다.
"칸트는 말했어. 거짓말을 안 할 거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지."
아이들은 나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순간 나는 다음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 음. 칸트는 말이야. 음 그건 말이야. 음. 정답은 다음 시간에."
아이들은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는 왜 이렇게 이야기가 새 버렸나 스스로 책망했다.
그렇다. 내가 요즘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말처럼 나는 사회성이 빈약한 찌질이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생각의 전환을 취하는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쿨하지 못한 찌질이가 아닌,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사람이기로 했다.
그러니까 삶의 방식이나 어떤 규칙에 대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내 자유의지에 입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그것이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스스로의 행동이 그들의 말과 눈빛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사회적으로 학습된 관습이 아닌 나 스스로의 분명한 기준에 의해서. 그래서 설혹 남들 눈에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보이거나 까칠해 보일지언정 내 삶의 방향과 본질에 맞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믿고 나아갈 수 있다고. 세상의 기준에 맞추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나의 기준에 맞추면 나의 자존감은 비교당할 일도 무너질 일이 없다고.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온갖 경쟁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고 평가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남과 비교해 우월감을 갖기도,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그러다 현실을 회피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해서 보기도 한다. 그 속에서 올바른 교육은 빛을 잃는다. 자존심을 지키려다 자존감을 잃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래서 찌질이가 되지 않으려다 모두 찌질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세상에 기준을 두지 말고 나 자신의 양심에 기준을 두는 자유의지를 요즘 나는 생각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