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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pr 27. 2021

노화는 발뒤꿈치에서 온다

  2021년.

 공상과학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이 낯선 숫자의 연도가 벌써 4월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간다.  늘 하는 소리지만 세월은 왜 이렇게 빠른 걸까?  내 마음은 여전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의 터널을 통과한 지 십여 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의 두께가 그간 쌓였다니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20대였던 1990년대의 기억들은 일 년, 일 년이 각각 하나의 두꺼운 낱권으로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데,  왜 30~40대의 세월은 1권짜리 단편집으로 압축되어 기억되는 걸까?  이게 나만 느끼는 이상한 기억법이 아니라면 이러한 세월의 두께와 인식의 간극 문제를 증명해 줄 뇌과학계 또는 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은 없을까?


    시간에 대한 감각이 이처럼 무딘 나는 몸의 감각 또한 많이 무디다. 그래서 내 얼굴에 내린 세월의 자국들에도 민감하지 못하다.  또 나는 유전적으로 흰머리도 거의 나지 않는 편이고,  단순하고 낙천적 성격으로 갱년기가 무언지도 잘 모른다.  또한 타고난 체력으로 집과 직장에서 누구보다 제일 바쁘게 뛰어다닌다. 그나마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노안도 근시 안경을 평생 써 온 시력 탓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을 느끼는 시간적 감각도,  나이를 느끼는 신체적, 정신적 감수성도 부족한 나이기에 내 또래보다 철없는 모습으로 사는 편이다.  이런 내게 노화가 현재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계기가 최근에 생겼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바로 내 발 뒤꿈치를 보면서부터이다.


  어느  우연히 발뒤꿈치가 양말을 스치는 느낌이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느다란  실로  그물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미세하게 발뒤꿈치가 갈라져 있는  보였다. 그래서 양말을 벗을 때마다 가벼운 마찰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까칠한 발뒤꿈치의 촉감과 거친 모양새가  낯설고 당황스러워 한참을 만지고 쳐다보았다.  얼굴과 달리, 쳐다보지 않으래야 않을  없도록   앞에 떡하니 놓여  신체의 세월을 증언하는게 자꾸만 신경쓰였다.  그때부터 나는 그동안 기껏해야 얼굴에 찍어 바르던 로션을 처음으로 발에도 열심히 발라 문질러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을 로션이나 핸드크림을 정성껏 발라주어도 여전히  발뒤꿈치의 거침과 갈라짐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잔가시 같은 거친  조각들은 노화를 외치듯 일제히 일어났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 단순히 수분이 부족하여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쌓이고 쌓였던 시간의 결과물임을 선언하듯 자꾸만 도드라졌다.


   눈가의 주름과 흰 머리카락, 시력의 변화는 끝내 모른 척하던 내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미세하게 갈라진 채 까칠하게 나를 바라보는 내 발 뒤꿈치의 표정을 모른 척하기에는 이제 더 이상 2021년이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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