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07. 2021

미러링이 답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1990년대,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잘 몰랐던 내가 우연히 읽은 책에서 <페미니즘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만큼이나 어려운 사고의 혁신>이라는 문구에 충격을 받았었다.  중세 사람들은 신이 만든 이 세상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도는 한낱 행성에 불과하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감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녀가 동등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왜 이렇게 어려운 사고 혁신을 요구할 만큼 어려운 문제인지 그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서구 여성들의 권리 신장이 근대 민주주의가 완성되던 시기에조차 전혀 진척이 없었으며, 흑인 노예들의 해방 운동 과정에 와서야 그 궤를 함께 하며 성장해서 20세기에 가시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얼마나 공고하게 뿌리 박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철저하게 차별받던 하층계급보다 여성들이 더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남녀 모두 느끼지 못할 만큼 성차별은 생물학적, 사회적 차이로 포장되어 있었다.  


  1990년대 당시에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성평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되돌아온 반응은 그야말로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였다.  특히 당시 운동권으로 이름을 날리던 같은 과 후배 남학생이 보인 냉소적인 반응과 또래 여학생들의 무반응에서 느꼈던 분노를 나는 그날 밤 길고 긴 일기로 남기며 이겨냈어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기존 질서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던 운동권 학생들조차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며 최근 터져 나오는 586세대들의 성추문 사건을 보며 양성평등 문제야말로 독재 타도나 노동운동보다 어려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필요함을 확인했다.  무의식 아래 깔려 있는 문제라 더욱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에 읽은 책인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크 센델이 말하길 가장 거부감 없이 오랫동안 용납된 차별은 학력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차별이라고 하였다.  개인의 성취라고   있는 학력과 능력으로 얻은 보상을 차별이라 말하는 도발적인  책을 읽으며, 과거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관습의 결과를 차별로 규정짓고자  일들이 얼마나 다른 이들에게 해괴하고 낯선 로 느껴졌을까 새삼 생각해 보았다.


  30 전에 비웃음만 사던 성평등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이제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아닌 당연한 일이 .  이상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듯이 양성 평등에 대한 대전제에 어떤 이견도 갖지 않는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기본적인 참정권을 부르짖던 20세기 전후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성평등을 입에 올려 갑분싸가 되고만 1990년대의 나로부터, 이제는 일상  성차별적 문화(관습적인 언어 표현에서의 성차별, 외모 품평, 육아와 집안일 분담, 가부장적 가족 문화, 직장  유리천장 문제 ) 남아 있는 성평등을 이루어가는 방식에 따른 첨예한 논제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얼마 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머리에서 촉발된 <페미>라는 단어가 현재 얼마나 혐오적인 의미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몇 년 전  <페미니즘의 품위> (https://brunch.co.kr/@jinong115xisi/8)라는 글을 쓰며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미러링에 대해서 우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도 내가 당한 만큼 느껴봐야 돼.  

욕에는 욕, 혐오에는 혐오로 갚아주마.

              


 피해자, 그리고 약자의 입장에서 이 말은 얼마나 속 시원한가? 하지만 과연 이게 맞을까?

억울한 자는 말할 것이다. 이유 없이 당한 피해자보다, 그래도 이건 이유 있는 폭력이라고.

하지만 미러링은 결국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빌미를 주고, 일반 남성들에게는 가해자와 동일시되었다는 느낌에 오히려 피해자를 가해자와 같게 바라보게 되어, 결국 가해자와 같은 편이 되게 하는 역작용을 만든다.  


  나도 과거에 억울할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면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너도 똑같이 당하길 바란다'라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주류가 되면 안 된다.  그러면 가해자들은 일반인들 뒤에 숨어서 자신들이 주류인양 교묘하게 사실을 비틀어 버린다.  그러면 그녀들을 지지해줄 올바른 사고의 남성들조차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우리가 흑인이 아니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흑인 해방과 차별 반대를 당연히 지지하듯이, 남녀의 문제도 인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주류에 페미니즘을 안착시킬 수 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던 얼치기 페미니스트였던 나의 20대처럼, 한 때 페미니스트들이 극단적인 성차별주의자들의 언어폭력과 외모 비하 등 과도한 조롱과 멸시, 비난 속에서 할 수 있는 방어라곤 미러링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역지사지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는 역지사지와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미러링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입장을 바꾸는 것은 공감의 문제이지만, 미러링은 보복의 문제이다.

입장을 바꾸는 것은 대화의 제스처지만, 미러링은 선전포고이다.

공감과 대화는 공생이지만, 보복과 전쟁은 공멸이거나 상처뿐인 승리다.


  미러링은 내 마음을 즉각적으로 전하고 속이 시원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느낌이지 결국 폭탄 돌리기와 같은 것이다. 괴물을 이기고자 스스로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비주류의 성차별주의자들과 싸우고자 비주류의 길을 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난제와 갈등을 슬기롭게 이겨낸 경험이 있고 자유로운 토론과 건강한 여론 형성이 가능한 집단지성이 작동되는 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이번 <안산> 선수 일처럼 말이 되지 않는 자들을 굳이 상대하거나 미러링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공론의 장으로 데려올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 없는 지성 따위를 기대하지 말고 휴머니즘을 지닌 집단지성의 공동체와 함께 연대하며 마지막 인류의 난제 중 하나인 성평등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빌어먹을 이념 따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