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동호회 모임에서 기분 좋게 한잔했다. 그런데 내가 말이다. 딱 네 나이일 때 운동을 시작했어. 그 덕분에 지금의 50을 잘 버티고 있지.”
이때 나는 40대 중반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뱃살 좀 빼셔야겠어요.”라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듣던 말이었다.
모임에서 건강 이야기가 나오면 내 배를 힐끔거리는 눈빛과 마주하곤 했다. 가까운 지인들과 만날 때도 수영이 좋다느니, 헬스가 좋다느니 운동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하도 듣다 보니 신물이 났다.
어느 날은 친한 형이 웃으며 내 배를 툭툭 치다가 ‘좀 빼야겠다.’라고 해서 마음도 상했었다.
당시 나는 지점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겨웠고 내 속사정을 쉽게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서 쓸쓸했다. 외로웠다는 표현도 맞다. 그래서 더욱 지점장 모임이나 동종 업계에서 친해진 지인들에게 배 얘기는 그만하라고, 기분 나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감정이나 입장을 생각지 않고 아무렇게나 툭툭 말을 했지만, 멘토 형님은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내 약점 즉 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평소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형님은 많이 취해있었고 그 와중에도 나를 위해 전화를 준 것이라서 약점을 언급해도 전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형님은 마치 내가 당장 운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진중하게 말했다.
“꼭 운동 시작해라.”
“네. 형님.”
문득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엄지발가락 끝만 살짝 보일 듯 말 듯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도대체 무슨 운동으로 이 뱃살을 쏙 뺀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고 막막했다. 형님과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어린 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5살, 작고 여린 손으로 간신히 배를 덮고 있던 내 티셔츠를 올렸다. 그러고선 내 배를 찰지게 탁탁 치면서 낭랑하게 말했다.
“아빠! 이제 뱃살 좀 빼야겠어.”
딸의 표정과 말투가 귀여워서 버쩍 안아 올렸다. 내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쪼르륵 현관 앞까지 달려와서 아빠 넥타이도 풀어주려 하고 ‘아빠 고생했어.’ 하는 눈빛으로 방긋방긋 웃어주는 아빠 바라기 딸인데 다섯 살 아이에게도 적잖이 심각해 보였구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것일까? 내 딸 건강하게 크도록 지켜줘야 하는데 우리 딸 커서 시집갈 때 환한 미소로 축복해 주려면 내가 건강해야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었다.
그날 멘토 형님의 전화, 사랑하는 딸아이의 눈빛이 움직여야겠다는 결심으로 이끌었다.
생각해 보니 내 배가 커질수록 나는 더욱 소심해진 것이었다. 그동안 나에게 불편한 눈빛을 보냈던 이들, 회피하고 싶은 말을 자꾸 꺼냈던 이들 모두 나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진정 나를 걱정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남의 입장도 생각지 않고 말을 툭툭 내뱉는다고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지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게으른 생활 습관으로 나온 배가 아니라, 내 삶의 태도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