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가 되자 투어 인원이 다 모였다. 모두 스무 명 남짓. 가이드님은 20대 후반의 에너지 넘치는 여자분이셨는데 매우 친절하셨다. 룸메이트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는데 이분도 직장을 그만두고 오셨다고 했다. 한 달 남짓 유럽을 여행 중이고 터키가 마지막 여행지란다. 근데 20인치 정도 되는 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갖고 있길래 이걸로 한 달 여행을 하기에 작지 않았냐 하니 중간에 짐을 한국으로 한번 보냈다고 했다. 5박 6일을 함께 해 본 그녀는 매우 쿨해 보였으나 배려심이 많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였다. 대학병원 근무를 끝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할 시기에 여행을 왔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투어버스에 올랐다. 첫 번째 목적지는 파묵칼레. 버스를 타고 밤새 달려 도착할 예정이다. 야간 버스는 처음 타봤는데 의자에서 밤새 어떻게 잠을 잘지가 벌써부터 걱정됐다. 가이드님은 투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한 후 버스 불을 바로 꺼주셨다. 하지만 난 너무나 불편해서 쉽게 잠을 자지 못했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어폰으로 노래만 계속 듣다 겨우 잠들었다. 하지만 중간에 2번 휴게소 같은 곳에 내려 화장실도 가고 스트레칭도 하느라 잠을 내내 설쳤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에 도착한 호텔. 이곳에서 2박을 하게 된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씻지를 못해 엉망인 몸을 이끌고 조식을 도시락으로 간단히 먹었다. 너무 쉬고 싶었지만 바로 투어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피곤함을 가득 품은 채 히에라폴리스 유적지를 향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버스에 내려 한참 올라가니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곳은 히에라폴리스라 불리는 곳으로 고대 도시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은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하고 멋있었는데, 말을 하니 울림이 있어 너무 신기했다. 그 옛날 마이크 시설 없이도 관객들에게 충분히 소리가 잘 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 유적들은 내려가서 파묵칼레를 보고 난 후, 또 보게 된다고 했다.
파묵칼레
"와아~진짜 멋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진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파묵칼레. 마치 눈 덮인 산처럼 석회가 얌전히 쌓여있고, 온천수가 흘러 만들어진 그 밑의 호수는 청명한 에메랄드 빛을 내뿜으며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 보고, 석회로 둘러싸인 언덕에 올라 신발을 벗고 온천수에 발도 담가보니 그간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좋았다.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이후 우리는 드넓게 펼쳐진 히에라폴리스 유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감상했다. 흩어진 돌들과 기둥이 전부였지만 고대 시대의 돌과 건축물이라고 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내가 보고 만지는 돌을 그 시대의 사람들도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기분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미래의 우리가 이렇게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당연히 몰랐겠지? 약 2천 년 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나처럼 하루하루를 바쁘고 성실하게 삶을 살고 있었겠지? 이곳을 돌아보면서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때가 훌쩍 넘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난 개인적으로 터키의 음식이 대부분 입맛에 맞아 잘 먹으며 다녔었다. 그래도 토종 한국인이라 김치는 늘 생각이 났었다. 그런데 함께 투어 하시는 분들이 김치를 싸오셔서 조금씩 나눠주시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김치 하나에 이렇게 밥맛이 좋을 수가! 그분들께 참 감사했다.
느지막한 오후는 온천수가 흐르는 풀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난 수영을 못해서 그냥 쉬는 걸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가 되자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 움직이는 게 힘들 정도였다. 이후 호텔에 돌아와 저녁도 빨리 먹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잠을 잤다. 다음날도 꽉 찬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