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눈, 보는 귀? #형상화 #역지사지 #주변부에 관심 주기
숙소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나섰는데 아직 11시도 안 돼서 민 군이 배가 고프다고 성화입니다.
저녁에 가려 했던 프라하의 유명한 정육 식당에 가서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어요.
벌써부터 민 군의 머릿속에는 지글지글 잘 구워진 스테이크와 수제 햄버거, 소시지가 아른거리나 봅니다.
음식점을 향해 평소보다 빨라진 걸음을 옮기면서 녀석의 ‘배고프다’는 성화를 잠시나마 피해 볼까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식욕을 자극했는지 “입에 침이 고인다”며 버럭, 역효과만… ㅋㅋㅋ
어떤 대상에 대해 상상으로 그려내는 능력, ‘형상화形象化・imaging’라고 합니다.
현실에서 분명한 형태를 띄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상으로 떠올리는 겁니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형상화를 통해 세계를 재창조해 냅니다. 머릿속에 상상한 것, 마음 속에 그려 본 것을 시인이나 소설가라면 글로, 음악가는 음표로, 수학자는 방정식으로, 또 무용수는 춤으로 표현하는 거지요.
형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 능력은 예술적 감각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학, 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형상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예술 활동에서도 형상화를 잘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잠시 연구를 놓고 나와 피아노, 바이올린을 연주하곤 했답니다. “내 발견들은 음악적 지각의 결과물”이라고까지 했을 정도라네요.
2020년 2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아니 비영어권 언어 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 각본, 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줬던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 그의 각본집과 스토리보드storyboard집이 또 하나의 화제가 되었지요.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옮긴 것으로 흔히 콘티conti라고도 하는 이걸 봉준호 감독은 전문 작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그리는 걸로 유명합니다.
어릴 적 소설보다 많이 읽은 만화책 장면을 혼자 열심히 흉내내며 훈련한 덕분이라고 하더라고요.
‘비주얼 싱킹visual thinking’, 시각적 사고가 부쩍 주목받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환경, 직장에서의 업무에서는 이미 오래 됐지만, 최근에는 동영상과 같은 시각적 정보를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요즘 아이들을 위한 교육법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복잡한 주제까지 그림과 글로 표현해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업의 리더는 조직의 미래 비전과 전략적 방향성을 몇 페이지 보고서가 아닌 단 한 장의 그림으로 제시하기도 하죠.
비주얼 싱킹은 창의적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줍니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머릿속에 그린visualize 아이디어를 마인드 맵mind map으로 확장하고, 이야기로 풀어내 보는storytelling 등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다보면 더 다양하고 풍성한 해결 방안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주얼 싱킹을 사고 도구로 구사한 사람은 많습니다.
온갖 그림을 곁들인 메모로 노트를 채웠던 다 빈치는 물론이고,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 월트 디즈니, 니콜라 테슬라, 그리고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제프 베조스 이런 시각적 사고에 능한 비주얼 싱커visual thinker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상화, 그 중에서도 시각적 사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내 앞에 실재하지 않는 ‘햄버거’나 ‘의자’ 따위를 눈을 감고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매우 소수이긴 하지만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눈을 뜬 채로’ 그것들을 그려내고, 심지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있다고 해요.
물론, 형상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라면 눈 앞에다 실제 햄버거나 햄버거 사진을 가져다 보여주기 전에는 마음으로 그걸 상상하고 그려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겠죠.
전문가들은 내 앞에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눈을 감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의 형상화는 ‘타고 나는’, 흔치 않은 재능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꾸준한 연습과 훈련으로 공을 들이면 확실히 더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네요.
우선은 수시로 시각적 상상력을 연습하는 게 중요합니다. 소설책 펼쳐 놓고 읽을 때도 장면을 그려보는 연습을 하는 거죠.
스케치, 드로잉 같은 미술 활동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읽을 때가 아니라, 쓰고 표현할 때도 그림 그리듯 대상의 모습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30년 이상 경력의 정철 카피라이터는 『카피책』(허밍버드, 2016)에서 ‘글자로 그림을 그리듯’ 구체적으로 쓰라고 강조했습니다.
‘잘생겼다’보다는 ‘장동건 동생일 거야’, ‘많다’보다는 ‘삼십육만 칠천팔백 개’, ‘꼼꼼하다’보다는 ‘손톱 열 개 깎는 데 꼬박 20분을 투자한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그려’주라는 거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도록 한다는 건 글귀와 함께 ‘사진 한 장을 찰칵 찍어 배달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더 생생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글 한 줄을 적을 때도 틀에 박힌 표현, 두루뭉술한 표현을 최대한 피하고 어떻게 더 구체성을 더하고, 더 뾰족하게 다듬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것이 시각적 사고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형상화가 꼭 ‘시각’적 사고에만 국한되는 건 아닙니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까지 오감을 동원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 속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시각을 차단한 채 귀로만 듣고 상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게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건데요.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렇게 종이 위 활자로부터 눈을 돌리면 ‘들으면서’ 더 많은 이미지를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직접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찍어 보고, 작곡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음식을 만들고 하는 다양한 예체능적 활동들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아마 형상화를 주로 우뇌가 담당하기 때문 아닐지…
형상화 능력은 다른 한편으로는, 꼭 언어적, 표현적 활동과 조화를 이뤄야만 합니다.
형상화로 갖게 된 마음 속 이미지를 다른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이나 글이든, 방정식이든, 음악, 춤이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변환되고 표현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 멀리, 끝 모를 데까지 뻗은 드넓은 초원.
울타리 근처 한가로이 나뭇잎을 뜯는 기린 두세 마리.
세계 4대~5대 동물원 중 하나로 꼽히는 ‘프라하 동물원Prague Zoo’ 한 켠의 풍경입니다.
프라하 동물원은 도심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 우리로 치면 서울 북쪽 북한산 아래 자락 정도에 약 58만㎡ 규모의 넓은 부지에 조성됐는데요, 2015년 말 기준 포유류, 파충류, 조류, 양서류 등 총 681종 4716마리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1973년 문을 연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경우 전체 대공원 면적이 53만㎡지만 그 중 동물원은 불과 2만 8천㎡, 2020년 기준, 보유 동물 수가 100종 700여 마리라고 하니 둘의 규모를 비교해 볼 수 있겠지요?
동물원은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 코스로도 많이 찾는 곳이지만 갈 때마다 항상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곤 했어요.
곰곰 생각해 보면, 그건 다름 아닌 ‘죄책감’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을 거닐었어야 할 사자며 코끼리, 기린을 잡아다가 조그마한 우리에 가두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놓은 인공적인 동물 전시장.
책이나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동물들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만날 수 있으니 아이들에겐 즐겁기 그지없겠지만 어른이라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은 안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프라하 동물원에서는 그런 불편한 마음이 거의 안 드는 거에요.
인위적인 동물 전시장을 구경한다기보다 공원을 산책하거나, 가벼운 산행을 하는 와중에 자연 속에 있는 동물들을 만나게 되는 느낌이랄까?
동물이 주인으로서 제 보금자리에서 손님을 맞고, 사람들은 마치 남의 집을 방문한 듯 예의를 갖춰 조심스레 인사하는.
어떻게 이런 반전이 가능했을까?
거기에는 기획 단계부터의 발상의 전환과 치밀한 설계, 구축 그리고 사후 관리까지 관통하는 나름의 철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프라하 동물원이 처음 구상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넘은 1881년의 일이라고 해요.
이후 준비 위원회가 꾸려지고도 한참이 지난 1919년 공사가 시작됐는데 1922년에 주변의 한 대농장주가 대규모 땅을 기부하면서 탄력을 받게 됩니다. 1931년 정식 개장했다니 50년이나 걸렸네요.
많은 동물원이 ‘멸종위기종의 보호’ 같은 구호를 내걸고 있지만 대도시 도심 근처, 좁은 구역에 동물들의 거처를 만들고 희귀한 달리 말하면 ‘관람객을 끌만한’ 동물들을 데려다 놓는 것만으로 ‘동물 보호’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죠.
프라하 동물원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 중심으로 관람객이 보고 즐기기 편한 설계보다는 정말 ‘동물들의 입장에서 살기 좋은 환경을 꾸며 놓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준비 위원회는 애초 각 동물들의 거처를 꾸밀 때 해당 동물의 원래 서식지를 직접 찾아가 연구하고 최대한 그대로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고 해요.
예를 들어 활동 반경이 넓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동물의 경우에는 공간을 그만큼 충분히 넓게 확보해 주는 거죠.
포유류, 파충류 등 각각의 특성에 맞도록 테마로 꾸며진 구역과 구역 간 거리를 꽤 넓게 벌리고 그 사이사이 휴게 공간도 친환경적으로 마련해 뒀습니다.
그 결과 동물에게만 좋은 게 아니라 방문객에게도 녹지를 천천히 여유롭게 산책하며, 자연 속에 어우러지는 편안한 느낌을 선사할 수 있게 된 거죠.
어린이날 같은 대목 밀려드는 인파 속에 사자, 호랑이보다 사람을 더 많이 보고 돌아오는 여느 나라 동물원들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릅니다.
-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몽蝴蝶夢 이야기
프라하 동물원은 그렇게 ‘사람이 동물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동물이 제 집을 방문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으로 관점을 전환하고, 입장을 바꿈으로써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반전과 전복은 무심코 그냥 한 번 자리를 바꿔 보고, 뒤집어 보는 그런 간단한 시도로부터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와 같은 일견 명백(?)해 보이는 명제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와 같은 유명한 격언을 그냥 한 번 뒤.집.어. 보는 거죠.
관점은 저절로 바뀌어지지 않아요.
항상 있던 자리를 옮겨 보고, 늘 하던 말을 뒤집어 보면 그제서야 관점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두 그림의 다른 부분 찾기.
좌우로 배치된 같은 그림엄밀히 말해 ‘조금 다른’ 그림 속에서 미세하게 서로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게임, 아시죠? 흔히 ‘틀린그림 찾기’라고 부르는…
집중력과 기억력 훈련에도 좋다고 하지만 그걸 떠나서 ‘단지 재미있’기 때문에 가끔 아이와 함께 하는 놀이입니다.
자연스레 시선이 먼저 가는 가운데 부분이나 그림의 특정하게 도드라진 부분에서 어렵지 않게 몇몇 답을 찾기도 하지만 찾아내야 할 다섯 개 중 한두 개는 꼭 ‘의외의(?)’ 곳에 숨겨져 있어 시간 내에 찾아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죠.
예전 어느 텔레비전 주말 프로그램 중에 ‘옥의 티를 찾아라’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 속에서 상식적, 논리적,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건데요.
관찰력, 주의력을 총동원해 몇 인치 TV 화면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답을 찾기 어렵죠.
특히나 정답은 직사각형 TV 프레임의 정중앙보다는 변두리, 외곽 주변부에 있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클로즈업 된 주인공의 얼굴처럼 카메라의 초점이 가리키는 곳에만 현혹되면 ‘사각지대’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때부터 의도적으로 ‘변두리’에 시선을 돌리는 놀이와도 같은 훈련을 이따금씩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연예인 모델이 라면을 맛있게 먹는 광고를 볼 때면 그 옆, 뒷 배경에 어떤 소품들이 배치돼 있는지를 보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볼 때도 뒷 배경으로 어떤 건물이 있고, 무슨 색 차가 서 있고, 또 지나가는 엑스트라 할머니는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그런 ‘부수적인 것들’에 일부러 시선을 돌려보곤 하는 거죠.
그런 적극적인 의도 없이 그냥 ‘무장해제’된 상태로 영상을 보면, 우리 시선은 연출자가 의도한 화면 속 특정한 곳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며 응시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카메라 초점이 가리키는 부분만 중요하고 그 외 다른 부분이 결코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죠. 그걸 받쳐주는 든든한 배경이나 비워진 공간여백 연출자의 의도, 즉 초점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 주게끔 도와주니까요.
그런데 어떤 중요한 것들은 그런 변두리, 배경에 있을 때도 있어요!
‘배경’, 즉 우리의 직접적인 인식의 바깥쪽에서 창의성의 단초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중심부를 완전히 외면하진 않더라도 이따금씩은 의도적으로 주변marginal areas, periphery을 살피는 것이 다른 많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관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달라진다 했습니다.
남과 다른 시선을 가지려면 다들 자동적으로 중심만을 바라볼 때 주변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어떤 의미에선 그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류mainstream에 끼지 못하고 소수의 예외적 부류가 될 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특색 없는 평균보다 개성 있는 소수의 가치가 더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역사의 많은 비범한 인간들이 그랬죠.
‘비범’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지 않나요?
그저 평범한 다수의 길을 걸어야 할까요? 아니면 독특하고 일반적이지 않게 보이겠지만 나만의 독창성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의미 있는 소수’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할까요!
- 봉준호, 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