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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승우 Jun 05. 2024

베니스 비엔날레 포커스 온 (1)

지난 4월 20일,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개막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제목은 ‘Foreigners Everywhere’(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큐레이터 : 아드리아노 페드로사)이다. 비엔날레에는 단 하나의 전시만 있는 게 아니다. 아드리아노 페드로사가 큐레이팅한 본전시는 두 개의 공간, 지아르디니(Giardini)와 아르스날레(Arsenale)에서 열리지만, 그 외에도 국가관 전시와 병행 전시(collateral event)가 있다. 국가관 전시는 말 그대로 국가별로 마련된 관에서 각 국가가 선정한 아티스트가 전시하는 것이며 병행 전시는 기업이나 기관이 아티스트들을 선정해서 하는 전시이다. 올해 90개의 국가가 국가관 전시에 참여했으며, 30개 이상의 병행 전시가 열린다. 이렇듯 본 전시 외에도 볼 전시가 많기에 그 중에 주목할 만한 전시를 선별해 소개하려 한다. ‘베니스 비엔날레 포커스 온 1편’에서는 본 전시 공간인 지아르디니와 아르스날레 안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열리는 국가관 전시와 병행 전시 중 주목할 만한 전시를 선정했다. 


캐나다 국가관 – ‘Kapwani Kiwanga : Trinket (카프와니 키앙가 : 트링케트)’ 전시


지아르디니아안에 있는 캐나다 국가관은 구조가 특이한 걸로 유명하다. 투명한 전시 공간 안에 구멍이 몇개 있으며 구멍 안으로는 나무가 자라 있어 방문자는 유리 벽 바깥으로 나무를 볼 수 있다. 안과 밖이 명확히 구별이 되지 않는 방식이다. 이미 형태 자체가 시적인 캐나다관에 캐나다 아티스트 가프와니 키왕가(Kapwani Kiwanga)에 자신의 작업으로 새로운 시를 그려냈다. 이미 바깥에서부터 아름답게 꾸민 캐나다관에 들어가면 벽 장식과 놓인 작업, 그리고 특유의 구조가 만들어낸 조화 덕분에 순간적으로 외부와 단절, 몰입하게 된다. 이미 안과 밖에 헷갈리게 지어진 건물을 키왕가는 자기가 선택한 선, 형태, 재료를 가지고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가 중앙에 설치해 놓은 것들이 어떤 역사적, 사회학적 혹은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는 건 미적 경험 다음이다. 실제로, 키앙가는 트링케트(작은 유리구슬)가 예전 베니스에서는 화폐로 사용됐다는 것에 영감을 받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캐나다관에서 볼 수 있는 큰 유리구슬은 키앙가가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리뇨의 한 장인에게 의뢰해 만든 것이며, 이로써 그녀는 베니스라는 도시, 상업, 국제화 등의 문제의식을 담으려 했다. 하지만 하나의 잘 그린 회화작품이 된 인시튜 작업에 몰입한 관객에게는 아티스트가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서 거창한 이론적 의미는 미적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호주관 – ‘Kith and Kin’(부모와 자식) 전시


호주관에 들어서면 스태프가 반갑게 영어로 환영의 인사말과 함께 주의 사항을 이야기한다. 앞에 있는 설치 작업 주위에는 물로 채워져 있으므로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어떤 설치이길래 못 가게 하는 거지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들어가 보면 놀랍게도 아카이브 형식의 설치 작업이다. 어두운 공간에 큰 테이블이 놓여있고 서류들이 정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서류를 잘 읽을 수가 없다. 바닥의 물 때문에 서류를 가깝게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설치 작업은 보통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하려 하거나 설득하려는 데 목적이 있기에 관객들도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가까이 가는 게 습관이 되어있다. 아티스트 아쉬 무어(Archie Moore)는 이런 관객의 행동을 예측했던 것일까 ? 그래서 습관적 행동을 제어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했던 걸까 ? 웃기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벽에 무슨 그림이 있다. 자세히 보니 무슨 표 같은데 이름이 적혀있다. 무어는 호주 원주민들의 가계도를 그리면서 6만 5천 년 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가계도가 중간에 끊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형적으로 설치 주변을 둘러싼 물이 우리와 설치된 작업에 다가갈 수 없게 거리를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무어는 관객이 자기가 그린 가계도에서 끊어진 흔적을 발견하길 바랐던 것 같다. 벽에 분필로 그린 가계도와 설치 작업은 상호 보완하며 관객을 작가만의 문제의식으로 이끈다. 


이집트관 – ‘Drama 1882’ 전시


이집트관에 들어서면 화려한 뮤지컬이 관객을 맞이한다. 그런데 뮤지컬의 느낌이 좀 특이하다. 배우들의 옷도, 표정도, 대사도 진지하기 그지없는데 미장센, 몸동작, 노래 리듬, 음악도 하나같이 명랑하고 신나기만 하다. 다시 말하면 내용은 진지하지만 형태는 유쾌하다. 와엘 샤키(Wael Shawky)가 만든 이 뮤지컬 ‘Drama1882’는 우라비 민족 혁명을 묘사한다.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집트에서는 군주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라비 혁명이 일어났는데 군주제를 무너뜨리건 결국 영국이었다. 영국 때문에 혁명을 실패한 이집트는 그 후 1956년까지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뮤지컬에서는 이 무거운 스토리가 유쾌한 형식으로 진행되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예를 들어 군인, 정치인들이 서로 협박하는 장면조차 등장인물들이 놀이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비엔날레 본 전시의 주제를 비꼬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현대 미술에서 ‘외국인’이나 ‘이방인’을 주제로 전시할 때는 다루는 주제는 생각보다 제한적이다. ‘망명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요약하면 미술에서 ‘이방인’은 언제나 약자이다. 뮤지컬에서 ‘외국인’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 ‘영국’이다. ‘외국인’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를 정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샤키는 뮤지컬의 형태를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만든 것처럼 본 전시의 주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뒤틀어 버린다. 대부분의 국가관 전시, 병행 전시의 주제가 본 전시의 주제를 염두에 두고 결정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샤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그 어느 전시보다 예외적이며 특별하다. 


알바니아관 – ‘Iva Lulashi, Love as a glass of water’ (이바 루라시 : 한잔의 물처럼 사랑하라) 전시


알바니아관은 이바 루바시라는 아티스트의 스튜디오와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전시된 그림까지 그대로 옮겨놓았다. 루바시가 자기 그림을 어떤 장소에 걸어두었는지를 보는 것도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대부분의 그림에는 옷 벗은 여성들의 모습이 담겨있으며 이 자체가 성, 욕망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실제로 루바시는 그림의 소재를 에로틱한 영화에서 많이 찾았다. 그림을 통해 여성의 욕망, 충동, 성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한잔의 물이 갈증을 해소하듯 사랑으로 가볍게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성의 성적 욕망은 그림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아주 노골적이지는 않다. 은밀한 성적 욕망은 노골적인 욕망보다는 쉽게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 그럼에도 은밀함은 시노그라피에 의해 강도가 강해진다. 특히 타일로 장식한 벽 위에 그림을 전시함으로써 그림의 은밀함에 공간의 은밀함이 더해져 노골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 일반적인 벽에 전시된 다소 노골적인 그림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성의 욕망도 남성의 것만큼이나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잘 전달된다면 그건 시노그라피의 역할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관 – ‘Compose’(구성하다)


일본관은 한국인 이숙경이 큐레이팅한 ‘Compose’라는 제목의 전시를 통해 아티스트 유코 모리의 작품을 선보인다. 일본관에 들어선 관객은 익숙한 사물의 낯선 조합을 보며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 든다. 일본관의 전시는 관객이 이미 구성된 것을 자세히 관찰하도록 유도하며 상상력을 가지고 해석하도록 이끈다. 전시 자체는 미국 아티스트 사라 제(Sarah Sze)의 작업과 비슷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다양한 감각, 특히 시각, 청각, 후각을 동시에 자극한다는 점에서 사라 제의 작업과 다르다. 전시는 크게 두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Moré Moré’(누수)로 모리가 익숙한 사물을 사용하여 새는 물을 담아내는 구조의 설치이며 다른 하나는 ‘Decomposition’(분해)로 과일에 전극을 꽂아서 과일 속에 있는 습기를 전기 신호로 바꿔 빛과 소리를 만들어내는 설치 작업이다. 특히 ‘Decomposition’ 작품에서는 계속 변하는 전시 공간과 과일의 상태가 빛과 저주파 소리로 변환이 되기 때문에 모리의 작업이 갖는 일시적인 성격이 더 잘 나타난다. 두 작품 모두 작업의 재료를 베니스 현지에서 조달했으며 작품의 구조가 일본관의 구조와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인시튜(장소 특정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관 – ‘Motherland’(조국) 전시 중단


사실, 이스라엘관에서는 전시가 열리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관이 이번 비엔날레에 소개하려던 아티스트 루스 파티르(Ruth Patir)와 큐레이터들이 이스라엘관을 닫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비엔날레 시작 전 2만 4천 명의 미술 관계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번 비엔날레에 이스라엘관을 열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 편지에 서명을 하면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비엔날레 오프닝 바로 전날인 4월 16일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들은 전시를 닫기로 중단한다. 현재는 무장한 군인이 이스라엘관을 지키고 있으며 이스라엘관에는 ‘이스라엘의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는 인질 석방과 휴전이 이루어지면 전시를 다시 열겠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관 유리창에 가까이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면 전시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설치된 기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진행되지만, 정치 상황 때문에 전시를 볼 수 없게 된 상황이다. 결국 파티르는 다른 방식으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병행 전시 – ‘TREVOR YEUNG : Courtyard of Attachments, Hong Kong in Venice’ (트레버 영 : 이중으로 연결된 안마당, 베니스의 홍콩) 전시


아르세날레 입구 바로 앞에서 열리고 있는 홍콩 아티스트 트레버 영의 전시는 화려한 동시에 검소하다. 마당의 분수 형태의 설치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수족관이나 동물원에서 많이 보던 어항으로 가득 찬 공간이 나온다. 공간은 온통 파란 빛이며 어항의 물을 순환시키는 모터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항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응당 있어야 할 열대어는 없고 텅 빈 어항만 요란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여러 가지 설치 작업이 있지만 작업 속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트레버 영은 관객의 습관, 즉 어항에서는 물고기를 보는 습관을 이용해 관객이 스스로 처한 상황과 거리를 두게 해 자문하게 한다. 물고기가 없는 어항을 보는 관객은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레버 영이 의도한 답은 어렵지 않기에 관객들은 어렵기만 한 이론적 질문에 빠져들지 않고 상식선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트레버 영의 작업은 관객과의 놀이, 그것도 너무 어렵지 않은 놀이를 만들었다. 다만,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작업을 전시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과연 올바르게 쓰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생태학적 위기 상황을 인지하게 하는 게 이 전시의 목표라면, 과연 여기에 쓰이는 전력이 올바르게 쓰인다는 건 누가 보증해 줄 수 있을까 ? 이 전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인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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