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좀 가볍게 가도 되지 않을까요

삶의 기준을 낮춰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한 달 이상 글을 못쓴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예외 없이 늘 일이 바빴기 때문인데요.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한 달짜리 휴가를 갔거든요. 


올해부터 회사에 안식월 제도가 생겼습니다.  5년마다 한 번씩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연차 2주 + 회사 제공 2주인데요. (기왕 줄 거면 4주 다 유급으로 좀 주시지 회사느님) 직장생활 16년 만에 처음으로 한 달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회사 1달 쉬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병환이나 신변의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우리 문화에서 1달 휴가는 찾기 힘들죠. 저도 이렇게 길게 제 시간이 생긴 건 처음이라,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4주 전, 안식월이 시작되던 퇴근 후 금요일 밤.  

정말 비장한 각오로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엑셀로 남은 일자와 하고 싶은 일을 쭉 적어 내려 갔습니다. 이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느낌이었달까요.. (출처 에반게리온)

 

그동안 못썼던 브런치 글도 좀 써야겠고, 생각해두었던 글도 더 쓰고, 보고 싶었던 책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유튜브 채널도 열어볼까 싶고, To-Do List가 빼곡히 쌓여갑니다. 써 놓기만 해도 이미 다 해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회사 일 할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집중력으로 파일을 저장하고 휴가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났습니다. 

...아니 사라졌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출근하면 그렇게도 안 가던 시간이 휴가 중엔 이리 빠르게 지나다니요. 말이 되나 싶습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현실 부정하기 바빴습니다. 계획했던 것의 실행은 더디기만 했는데 노는 건 열심히 했고, 시간은 빨리 갔으니까요. 그날그날 노는 건 즐거웠지만 가슴 한구석이 막 시려옵니다.

3주쯤 지났을 때 휴가 전에 만들었던 엑셀을 열어보니 한숨만 나옵니다. 목표한 것의 10%나 했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흔치 않은데 이 소중한 휴가를 이렇게 보내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필요했던 아이템. (출처 : 중국 어느 쇼핑몰)


그렇게 망연자실해하다가 밖으로 나와 푸른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요즘 불멍(불을 보며 멍때리기)이 유행이라죠. 저는 이번 휴가 때 바멍을 배워 갑니다. 잔잔한 바다를 보며 멍을 때리는 거죠.

예전에 바다 오래 보면 우울증 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모르겠지만 삶을 반추하는 데는 좋은 것 같습니다. 잔잔한 파도를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뭐가 이리 급한 거지.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시킨 것도 아닌데. 좀 쉬어도 될 텐데.

지금까지 해 온 것도 뭔가 많이 한 거 같은데, 그 가치를 나만 폄하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한테 적용하는 잘했다는 기준은 대체 뭐지?"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과 비슷한 건데요. 늘 자신을 닦달하고 있는 내면의 저는 대체 그동안 한 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 걸까 싶었습니다. 저는 저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늘 '좀 더 하면 뭔가 더 해낼 수 있는데 안 하는 놈'으로 간주하고 있었죠.

이러면 자존감에 스크래치는 생깁니다만,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자꾸 뭐라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뭔가 이루고 성취하긴 합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누구든 합니다. 그걸 실행까지 가느냐가 차이를 만들죠. 마음속으로 제가 저를 쪼으면, 차이는 만들어졌습니다. 대신, 늘 피곤했습니다.


산에 오르다가 중간에 쉬어도 가고, 아래 경치도 보면서 이야 이만큼이나 왔네 하고 쉬어가며 올라와야 하는데, 앞사람만 보고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저 친구는 저렇게 안 쉬고 올라가는데 내가 여기서 쉬고 있으면 어떡하나 이 생각만 한 거죠. 제 뒤에도 분명 사람이 있는데, 일부러 안 봅니다.

분명히 제 뒷사람도 있는데, 앞의 사람의 등이 훨씬 커 보입니다.


제 기준이 없고 남의 기준만 보고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능력 되는 만큼 올라가면 잘한 건데, 남의눈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우도봉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도 하늘도 무심할 정도로 파랬습니다.


바다를 보며 멍하니 생각하다가 마음을 좀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뭘 할 건가가 아니라, 뭘 해 왔나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요즘 시대에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들을 그래도 하나씩 해왔었네요. 먹고 사는 걸 해결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왔습니다. 좀 더 날것으로 말하자면..

일단 살아있고요. (중요) 

적어도 내일 먹을 밥 걱정을 하고 있진 않습니다.(이것도 중요)

잘 곳 걱정도 하고 있지 않고요. 동일한 걱정을 몇 년 치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다음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러면, '아무리 범사에 감사하라지만 기준점이 너무 낮은 것 아니냐?' 고 생각하실 겁니다. 대부분 자신의 꿈, 커리어, 미래를 걱정할 때 생존이나 의식주 걱정을 하진 않죠. 

제가 이러는 건, 열심히 살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고

내일 먹을 것과 잘 곳 걱정을 해봐서입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저는 많은 것을 이뤘네요. 


그래도 가장 큰 성취는 브런치 독자가 무려 2,700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5년 걸렸으니 다른 슈퍼 작가님들보다야 여전히 거북이입니다만 제 글에 관심 가져 주시는 분들이 이 정도나 있다는 게 제게는 큰 성취입니다. 싸이월드 시절부터 여러 SNS를 해 오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적이 있나 싶네요. 그래서 글을 잘 써야겠다는 압박도 큽니다. 유튜브는 늘 로그인 상태여서 구독/좋아요가 쉽지만 브런치는 로그인 안 하고도 읽을 수 있으니 ID 만드는 분들도 많지 않거든요. 브런치 구독자 1명이 생기기까진 읽고만 가는 분 100명은 있는 터라, 지금 이분들 모두 제게는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산에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는 여유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만큼이나 왔습니다. 올라오다가 떨어지는 사람, 사망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고요.

다들 아직 갈길이 머실 것이고, 기왕 오르는 거 목표를 높게 가지는 게 좋습니다만 한 번씩은 올라온 길을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바멍을 끝내고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회사는 놀라울만치 아무 일 없었습니다. 다행입니다. 회사는 회사고 저는 저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앞으로는 어깨에 힘 좀 빼고 쓰고 싶은 글 써보려 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미 많은 것을 해 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삶에 루틴이 필요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