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 한글자에 울고 웃는 월급쟁이들을 위하여
바야흐로 연말입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롤송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거 아세요? 머라이어 캐리는 매년 저작권료로 40억원이 들어온다고 하네요. 버스커 버스커의 벛꽃 연금을 뛰어넘는 실로 어마무시한 금액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라이어 캐리는 매년 연말이 즐겁고 기쁘겠지만 우리 월급쟁이들은 다 그렇진 않을겁니다. 회사는 연말이 되면 내년 계획이다, 올해 성과정리다 바쁩니다. 더불어 직원평가와 승진, 조직개편 등을 진행하죠.
인사팀에서 평가 계획이 오고, 직원들은 자신의 한해 성과에 대해 구구절절 장황하게 입력을 하기 시작합니다. 관리자들은 자료를 보며 고민에 빠집니다. 대한민국 절대다수의 회사들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고과는 연봉인상율에 직결되는 경우가 많아, 다 잘 줄 수가 없습니다. 저놈을 잘 주면 이놈을 못 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상황입니다. 네, 대학교수님들도 비슷한 고민을 비슷한 시기에 하시고 있죠.
자, 여기에 각부서별로 승진 대상자 포진상황이라는 변수 하나가 더 추가됩니다. 대부분의 회사는 몇년차면 무슨 직급이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습니다. 그 덕에 자의든 타의든 '아무개가 승진대상자더라' 라는 것은 널리 퍼지게 됩니다. 회사 뒷담화중에 또 이만큼 재미있는게 없거든요. 링에 올려진 승진대상자는 1년간 열심히 달리게 됩니다. (그것이 업무든 정치든) 그 결과또한 고과평가에 드러납니다. 평가가 안 좋은데 승진할 수는 없으니까요.
관리자는 고민합니다. 아무개는 뭘 잘했고, 아무개는 승진해야 하고, 아무개는 작년에 못줬는데 또 못주기 어렵고.. 교수님들은 한번보고 안 볼터라 냉정하게라도 하죠. (물론 계속 보는 슬픈 인연도 있습니다) 직원들은 내년에도, 몇년후에도, 어쩌면 더 오랫동안 볼 수도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중간관리자가 고민한 평가결과는 상위 관리자 (보통 실장, 본부장 이런 타이틀을 가진 분들) 들이 또 조정합니다. 아 뭐가 이리 복잡하냐고요? 아니죠. 이는 관리자들을 위한 훌륭한 장치입니다.
"아 김대리, 난 잘 줬는데 본부장님이 이렇게 조정을 하셨네.. 옆 팀 박대리가 이번에 한건 해서 그런가봐. 어쩌지? "
번역하면 "야 난 잘 줬는데 다 본부장이 저런거임. 난 모름" 이런 의미입니다. 전가의 보도이자, 관리자 회피 만렙스킬이죠. 직원이 그렇다고 본부장에게 가서 사실관계확인을 할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이런 지난한 과정이 끝나고 나면, 한해를 정리하는 (듯한) 알파벳 하나가 당신에게 하사됩니다. 분명 ABCD는 아무 잘못이 없건만, 우리는 A를 사랑하고 D를 증오 & 혐오합니다. S는 분명 A보다 한참 뒤에 있음에도 S는 모두가 사랑하는 알파벳입니다. 슈퍼맨이 보면 빙그레 웃을 상황입니다. 모 대기업은 이러한 알파벳간의 불평등을 크게 우려한 나머지, 글자를 바꿔버리기도 했죠. E (Excellent) 를 필두고 S (Superior), I (Impressive) 등등 을 입맛에 맞게 나열합니다. 언뜻 들으면 다 잘한 것 같습니다. 네, 회사 인사팀이 고민을 거듭한 결과입니다. 조삼모사라도 직원들이 다 만족하면 해피엔딩이라는거죠. 역시 인사팀은 똑똑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10년 넘게 회사생활 해 오면서 조금은 조직과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행여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고과때문에 상심하고 우울해하고 있다면 이 말을 꼭 해 드리고 싶습니다.
음.. 뭔가 멋있게 한마디 하고 싶었습니다만.. 아마도 반응은..
무슨 멍멍이 소리냐, 내년 연봉 어쩌란 말이냐 등등의 반응이 있을 듯 합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늘 그랬거든요. 평가에 몹시도 집착했더랬습니다. 성과는 쥐뿔도 없어도 장황한 필체로 조선왕조실록을 공적서에 써내려갑니다. 갑자기 일찍 오고 늦게 갑니다. 평가철에는 회식에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추가로, 고과철에는 교보문고 핫트랙스 이런 음반가게 앞에도 안갔습니다 (CD를 파니까요) 가을부터 노래는 매번 아바만 들었습니다 (ABBA..)
그랬는데도 예상보다 낮은 고과를 받은 어느 해. 회사 밖으로 나와서 본 하늘은, 놀랍게도 어제 본 하늘과 똑같았습니다. 그저께 본 하늘과도 같았지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왜 난 회사가 하늘이라고 생각했을까'
회사는 회사의 삶을 살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있고요. 그 교집합에서 잠시 평가를 받을 뿐이고 당신의 삶은 계속 됩니다. 한해 중 잠깐 만나는 교집합 점에서, 회사는 회사만의 편협한 시선으로 평가할 뿐이지요. 사람마다 삶의 기준과 가치가 다릅니다. 누구는 회사를 인생의 최우선과제로 두고 살지만, 누구는 잠깐 머무는 정류장으로 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물론 회사에서는 회사를 위해 살라고 할 것이고, 회사에서 사는 척을 하겠지만 다들 회사가 목적은 아니잖아요.
S나 D를 따지기 보다 올 한해를 돌아보는 다른 단어를 찾아보길 추천합니다. 그게 뭐든 좋습니다. 그러는 너는 무엇을 찾았냐고 누군가 물어보실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은 올해의 단어는 '즐거움'입니다. 즐겁게 하고 싶은거 하며 보냈습니다. '일'이든 '놀이'든 말이죠. 그래서 후회가 없었네요.
창업주가 아닌 한, 회사에 인생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평가도 알파벳일 뿐입니다. 한발 떨어져서 더 중요한 것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도 더 그렇게 노력할 예정입니다 :)
제가 살면서 경험한 회사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아재감성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재미있으셨다면 오른쪽 위에 하트를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