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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이 아파트로 대변될 때

그때의 총명했던 그들은 다 어디에.

나이를 먹을수록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늘어갑니다. 별것 아닌 듯 항상 하는 거짓말인데 조만간 밥 한번 먹자, 술 한잔 하자 같은 것들입니다.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지만 실현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늘 하지만, 시간을 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직장 연차가 쌓일수록 쉽지 않은 일이 되어 갑니다.

'야 지금 강남역인데 나와라~'가 점점 어려워지는 거죠.


여러분은 1년 동안 친한 친구를 몇 번이나 만나시나요? 본인의 나이, 친구나 본인의 결혼 여부 등이 중요한 변수가 되겠죠. 가정이 없다면 자주 보던 친구도, 다들 결혼하고 나서는 1년에 한두 번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다들 비슷한 현실이다 보니 이런저런 정기적인 모임이 생겨납니다. 제게도 몇몇 그런 모임이 있는데요. 그중에 입사동기 모임이 있습니다. 같은 회사를 들어왔지만 14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 다른 회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이 모임이 재미있는 이유는 비슷한 나이 때에 같은 회사에서 시작한 터라, 각자의 발전사(실은 흑역사)를 잘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모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 술안주 주제란 게 사실 별거 없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 모임의 주제 변천사를 잠깐 볼까요. 그때는 여자 이야기와 회사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한참 혈기 왕성할 때였습니다. 아무개 여자 친구가 예쁘다는 둥, 동기 누구가 스튜어디스를 만나니 우리도 어떻게 껴서 만날 수 없겠냐는 둥. 쓸데없고 영양가 없는데도 그 어떤 주제보다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여자 이야기가 시들해지면 회사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습니다. 이런 제도는 문제가 있다, 조직이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낡은 조직문화를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안주가 좋아서인지 술도 술술 들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젊었습니다. (하아..) 조직은 어떻게 변해야 경쟁사를 이길 것인지, 그 속에서 난 어느 부서를 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신이 나서 떠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어갑니다. 20대 때의 여자 이야기는 조금씩 줄어갑니다. 희한하게 와이프 이야기는 약속이나 한 듯 술자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회사 이야기는 여전하지만 결이 조금 다릅니다. 조직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조직'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직 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내가 모시는 아무개 전무가 어떻게 될 것 같다 등등이죠.


30대 중반이 넘어서며, 예전 20대 때 이성 이야기보다 더 화제를 독점하는 주제는 '돈'이 되었습니다. 서로 월급 상황 뻔히 아는 터라 월급 모아 부자 되자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동산 이야기가 항상 중심에 섭니다. 이번에 어디 샀냐 어디가 올랐더라.. 동기 누구는 이번에 xx동에 들어갔는데 벌써 두배다 등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지인들은 이미 갑부 반열입니다. 난 뭐하고 살았나 자괴감이 듭니다. 분명 열심히 살았는데도 말이죠.


'웃긴' 명언이라는데 그냥 '명언' 같... (출처: 미상)


30대 후반, 40대에 들어서는 이야기의 거의 전부를 아파트 이야기만 합니다. 주제에 대한 몰입도가 이성 이야기 때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번에 거기를 들어갔어야 한다는 후회, 그 친구가 이번에 들어간다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는 망설임. 대화 속에선 다양한 감정이 묻어납니다.

저희 세대에게 부동산이란 신분상승과 인생 성공의 마지막 사다리 같은 느낌입니다. 급여 상승률이 아파트값 상승률보다 높다면야 회사에서 성과를 내고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는데 힘을 쏟겠죠.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알고 있습니다. 40대 초반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조직에서 어디까지 가겠구나..라는 예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부동산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듯합니다.


주식도 그렇지만 부동산도, 성공한 사람들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착시현상이 일어납니다. 다들 벌고 있는 것 같은 조바심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모임 때마다 부동산 이야기가 늘 뜨거웠습니다.


지난번 모임도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습니다. 2호선 안쪽으로 무조건 들어와서 어디든 살고 있어야 한다 vs 아니다의 논쟁 중이었죠. 저는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중간에 이렇게 의견을 던졌습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다들 사회가 요구하는 트랙을 성실히 걸어온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계속 사회가 정한 모범답안을 쫓고 있는 건 아닐까? 좋은대학-대기업-부동산 재테크..

돈이 다가 아닐 것이고 삶이 서울에 아파트 사려고 태어난 게 아니지 않겠냐. 근데 우리는 그거 말고는 답을 모르고 사는 것 같다


모임 분위기가 살짝 우울해졌습니다. 딱히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뿐만 아니라 제가 직장생활을 하며 보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회사생활의 성적표를 아파트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이가 좀 더 있으신 분들은 하나 더 추가됩니다. 바로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갔느냐'죠.

경쟁과 비교가 익숙한 한국인들이기에 정량화 지표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지고 있는 부동산과 자식의 대학교 명칭은 그런 의미에서 명확한 정량지표입니다.

저한테는 이게 슬프게 들렸습니다. 서울시내에 아파트를 사기 위해 인생의 황금시간대(20부터 50까지)를 투입한다는 소리 같았습니다. 돈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돈이 많은 인생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모두가 서울의 아파트만을 바라보고 사는 이 모습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구룡마을 판자촌과 타워팰리스. 무려 2018년 사진. (출처:연합뉴스)



술자리가 파해 지하철로 향하는 길에서, 저는 한 친구를 쏘아붙였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굉장히 우수했던 친구입니다. 항상 아이디어가 번뜩였고, 실행력도 있었습니다. 저 친구는 나중에 유명한 벤처사업가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랬던 친구는 요즘은 회사만 끝나면 부동산 강의를 들으러 다닌다고 했습니다. 주말에는 열심히 임장(직접 아파트를 보러 다니는 것) 중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너 같은 사람이 사업을 해야 일자리도 많아지고 부가가치가 생겨서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부동산이 대체 무슨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느냐는 첨언도 붙여서 말이죠.

그런데 그 친구의 대답에 저는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야, 스타트업 하는 수고보다  부동산이 훨씬 더 ROI 가 좋은데 왜 이걸 안 해? 여기 집중하는 게 성공확률이 훨씬 높잖아."


사실, 오늘 쓰는 글의 결론은, '우리 직장인들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서 하면 훨씬 더 행복해질 거예요'로 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지금과 같은 세태 속에 누가 부동산을 소홀히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돈이 부족한지 생각해 보라는 우스개가 회자되는 세상인데 말이죠.


회사원으로서의 제 삶은 길어야 20년도 되지 않을 겁니다. (20년이나 바라보고 있는 것도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회사에서 떠날 무렵에는 그때 제가 가진 '아파트의 가격'이나 '제 아이들의 대학교 명칭'으로 제 인생이 평가받고 싶진 않습니다.  마치 이런 느낌입니다. 제 비석에 아래와 같이 쓰여 있는 거죠.


'길진세 여기 잠들다. 서울 어귀에 ㅇㅇ 아파트 한 채를 사기 위해 살다가 가다.'

(아직 서울에 아파트를 못 샀기 때문에 죽지도 못할 판입니다)


저렇게 되고 싶진 않은 터라, 브런치 글을 씁니다. 저 혼자 해보는 작은 몸부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무엇이 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부동산 강의 듣는 것보다는 자기 재능을 좀 더 발휘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저는 즐거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모임에서 부동산 이야기 듣는 것보다는 사업 경험을 듣는 게 더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제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기왕이면 세상이 이상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이런 세상임을 인정하면 슬프지 않나요. 그깟 콘크리트 덩어리가 뭐라고 우리는 그것만 보고 달리는 걸까요.


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제가 협소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 생각해 봅니다. 직장인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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