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외로움을 즐길 때 성장합니다.

제가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지난 글 '나의 대기업 취업기'에서도 밝혔지만, 어려서부터 저희 집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어디 가서 이쪽 분야로 누구와 배틀을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이런 걸로 이길 수 있다고 자랑이라니.. 눈가가 촉촉해지네요.. (ㅠㅜ)

대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의 우산 아래 즐거운 대학생활을 할 때, 저는 늘 다음 학기 등록금을 걱정하고 생활비를 걱정해야 했죠.

처음 했던 아르바이트는 횟집 서빙이었습니다. 낮에 학교 수업을 듣고, 학교 근처 횟집에 가서 17시부터 문을 열고 청소를 합니다. 그날 횟감을 받아 수조에 물고기들을 우르르 넣고 나면, 사장님은 저녁밥을 주었습니다. 반년 동안 일하면서 메뉴는 매일 똑같았습니다. 꽁치구이, 김치, 밥. 그때로부터 21년이 흘렀지만 저는 지금도 꽁치구이를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아 다시 눈에 습기가 차네요. 아무튼 저는 꽁치가 제일 싫습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공부가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장학금이 아쉬워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1~2시에 도서관에서 내려올 때면 늘 출출했습니다. 가진 돈은 별로 없어서 선택지도 별로 없습니다. 학교 근처는 웬만한 업종이 밤샘영업을 합니다. 저는 작은 빵집이 좋았습니다. 밤이 되면 전날 못 판 크림빵을 싸게 팔았거든요.

그걸 먹으면서 하루를 생각하며 걸어갑니다. 오늘도 하루를 참 충실하게 보냈다고 위로하면서요. 친구들이 술 먹자고 할 때 못 간 건 아쉽지만, 나한테 선물(크림빵)도 주었으니 이걸로 되었다고 하면서요.


16년 전 어느 새벽에 찍은 하굣길 사진. 혼자 내려가는 그 길은 참 고요했습니다. (출처: 다락 속에서 발견한 고장 난 디카)


다행히 그렇게 보낸 시간들은 절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아 교내에서 전산 조교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20만 원씩 받으며 다닐 수 있게 되자 집에서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대한 이후로 집에서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제겐 큰 자랑거리입니다. 자랑하지 못하는 자랑거리죠.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외로웠습니다. 얼른 취업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취업을 했고, 저는 제 힘으로 돈을 벌어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해보며 지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1년, 2년 지나 보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생기니 놀기 좋았습니다. 즐거웠죠. 그런데 항상 그 자리였습니다.  발전이 없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지인을 만나든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든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들과 보낸 시간에서 크게 얻는 것은 없었습니다.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이렇게 지내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교 다닐 때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시험에도 약하고 암기도 잘 못 합니다.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공부는 정말 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은 서점이었습니다. 어떤 책이든 읽고 있으면 시간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참 좋았습니다.


살아보니, 인생을 잘 살았고 못 살았고의 나름의 기준이 생겨납니다. (점점 꼰대 글 같아져서 조금 찔리네요) 일단 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매우 정량적이고 측정 가능한 기준이 돈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기준으로 둡니다. 그러나 이게 기준이 되면 재벌 2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삶을 잘 살아버린 것이니 인정하지 않는 게 우리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제 기준은 그 사람이 살면서 만든 콘텐츠입니다. 누구나 살아온 만큼 자신의 콘텐츠가 생겨납니다. 삶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경력 일수도, 취미일 수도 있습니다. 차별화된 콘텐츠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는지가 삶을 잘 살았는지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콘텐츠는 무언가 머릿속에 남기고 사색을 하면서 생겨납니다.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생성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발전'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절대조건은 바로 자신만의 시간이죠.

타인이 없는 오롯이 자신만의, 그래서 외로움을 수반하는 시간.

온건히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생산할 수 있는 시간.


퇴근길에 가끔 사 먹는 크림빵. 제게는 하루의 마침표 같은 의미입니다.


꽁치와  달리, 학교 도서관에서 내려오며 사 먹던 크림빵은 종종 생각납니다. 지금도 늦은 시간 퇴근을 하면 집 앞 빵집에서 크림빵을  삽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입니다.

오늘 하루도 꽉 채워서 보냈다는 만족. 지겹고 외롭더라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쌓인 시간이 제게 큰 힘이 될 거란 것을요.


오랜만에 쓰는 브런치 글에 '라테'향 가득해서 송구합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평화는 파일정리로부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