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트루 Jan 17. 2018

01. 서울생활 10년, 유목민 탈출기

하우스메이트, 원룸을 거쳐 내 집에 살기까지..

구로의 마지막 밤이다.
이렇게 몇 년을 주기로 서울을 옮겨 다니는 삶,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첫 번째 : 하우스메이트]
처음 서울살이는 꽤나 고급스러운 곳에서 시작됐다.  
하우스메이트가 지금처럼 유행하기도 전인 2008년 취업이 되자마자 자취생의 죽마고우와 같은
피터팬 방 구하기 네이버 카페를 통해 정말 우연찮게 강남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에 <하우스메이트>로 들어가게 됐다.


선정릉 근처에 있는 삼x팰리x라는 그 당시 기억으로 전세 가격이 한 3억 5천 정도 하는 고급 아파트였다. 36평형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아파트의 방한칸을 보증금 100만 원에 월 35만 원이라는 정말 파격적인 금액으로 구하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집주인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하우스메이트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방 한 칸이 남게 됐고 그래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피터팬에 들어갔다가 정말 또 우연히 나의 절박한 글을 보게 됐단다 왠지 글 느낌이 순박하고 착해 보여서 그녀가 먼저 나를 하우스메이트로 제안하는 쪽지를 보냈고 회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고 좋은 아파트라는 점에 끌려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바로 입주해서 지냈었다. 심지어, 침대, 화장대, 붙박이 장까지 풀 옵션이었고 함께 공유하며 쓰게 된 거실과 주방 화장실은 고급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포스코 사거리 선정릉 근처에 위치한 아파트를 즐길 새 없이 매일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근무 특근으로 지쳐만 갔다. 그 아파트에서 거주하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오피스를 강남에서 광화문으로 옮겼고  출퇴근 시간이 늘어나 버린 나는 더 이상 이 아파트의 매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야근으로 늦게 집에 들어오면 같이 사는 물론 다른 방이지만.. 집주인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일까.

우리는 누구나 나만의 집을 꿈꾼다. 조용하고 포근한 ..

[두 번째 : 원룸 ]

그렇게 10개월가량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전세계약 만료로 집을 비워야 한다며 퇴거 통보를 받았다.
서울살이에 아직 적응도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에게 또다시 집을 구해야 하는 미션이 떨어진 것이다.
회사 위치가 광화문이었기에  때문에 그 당시 그와 함께 (현재는 나의 신랑) 5호선을 훑기 시작했다.
그때 조건은 정말이지 간단했다. 지긋지긋한 야근과 철야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무조건 짧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호선이어야 할 것, 지하철 가까이 위치, 1층 이상 등 몇 가지 간단한 조건 만으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오는데 생각보다 원룸 매물이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5호선 라인이 자취 하기에 적합한 동네가 아님을 알지 못했다. 지하철 정거장마다 내려서 부동산을 들려 매물을 확인했다. 그렇게 구하게 된 곳이 왕십리역에 근처의 원룸. 앞서 말한 조건에는 전부 만족하는 곳이었다.  필리핀관광청 등  PR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어서 나름 세련미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때였다. 가까운 지하철역 명칭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네가 그렇게 낙후했는지도 그리고 우범지역인지의 여부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다른 부분들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무려 3년의 시간을 보냈다.

20대의 내 청춘을 오롯이 바친 홍보회사에서의 삶은 하루 7시간 남짓 잠만 자고 빠져나오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2017년 6월 방문한 스위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쌓인 이런 집에 사는 스위스인들이 내심 부러웠다.


[세 번째 : 원룸]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 다음 직장이 정해지지 않은 정말 모지리 같은 시간들을 마주 했을 때 직장과 관계없이 집을 구한 것은 처음이었다.  답십리보다는 1~2평 정도 큰 방이었는데 구조가 정사각형이 아니라 옆으로 긴 직사각형이라 활용도가 떨어지는 방이었다. 주방은 말도 안 되게 작아 그 집에서는 정말 요리를 해 먹어 본 게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 당시 나름 친하게 지냈던 언니가 사는 동네를 딱 한 번인가 돌아보고 두 번 집을 보고 바로 그 원룸으로 하기로 정해버렸다. 마음이 지쳐있으니 다른 부분은 또 신경 쓰고 싶지 않았었다. 낙성대역에서 5분여 정도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원룸이었는데 낙성대역 5번 출구 쪽 은 정말이지 원룸의 메카였다. 서울대가 근접해 있기 때문인 건지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그 지역의 기운이 유독 맘에 들었다. 신림, 서울대입구역과 다르게 북적이지도 않고 역에서 조금만 빠져나오면 주택가로 한적했다. 그런 점이 그저 좋았다. 그리고 동네에 친구들이 몇몇 포진해 있다는 사실도..

그렇게 긴긴 시간을 서울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며 월세를 내며 살았다. 일을 마치고 혹은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어두운 방에 불을 켤 때 그렇게 외로울 수 없었다. 이제야 돌아보니 부모님이 함께하는 누군가 나를 반겨주는 포근한 집이 그리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뎠던 시간들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

작가의 이전글 겨울의 제주도를 느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