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서울에서의 인연이 제주로 이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친구들 중에 가장 최근 제주생활을 시작한 P가 있다. 손으로 꼽아보면, 젊은 날 직장에서 만나 20년을 넘게 이어진 인연이다. 우리는 직장에서도 근무지를 세 번이나 같이 옮길 정도로 단짝이었다. 부서는 달랐지만, 서로의 회식에 함께 초대될 정도로 우리의 관계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사이였다.
내가 먼저 이른 명퇴를 하고 제주로 내려왔을 때, 나의 제주생활을 가장 동경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녀와 나는 취향이나 성격 면에서 언제나 쿵작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노는 데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내가 주로 일을 도모했고, 넓은 아량과 순수한 흥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언제나 흔쾌히 맞장구를 쳐주곤 했던 것이다. 함께 만들어간 남다른 추억은 우리의 젊은 날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세월이 흘러 그녀도 명퇴를 하고, 제주에서 가장 따뜻한 마을 보목에 둥지를 틀었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지척의 거리다. 오일장 신문에 나온 조건 좋은 매물을 소개했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응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루씨쏜 아뜰리에로 은퇴 후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남편을 모시고 전시회를 찾아왔다. 아주 예쁜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갤러리 카페에서 차를 나누며 시작된 이야기는 법환의 전복 돌솥밥 집으로, 바닷가 찻집으로, 새섬의 일몰로 이어지며 무르익었다. 새삼 인연의 깊이를 헤아려 본 하루였다.문득 헤르만 헤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인연의 싹은 하늘이 준비하지만
이 싹을 잘 지켜 튼튼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순전히 사람의 몫이다.
인연이란 인내를 가지고
공과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한 포기 난초인 것이다
민화는 비단에도 그림을 그린다.
처음에는 종이가 아닌 천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너무 낯설었다. 굳이 천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기심보다는 의아함이 컸다. 중급반의 교육과정 중 하나이니 그저 통과의례로 여겼다. 마치 초급반에서 책가도를 할 때의 심정이었다. 꽃도 나비도 인물도 아닌 서재를 그림으로 그리는 취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과정을 이수하면서 새록새록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과연 공필화도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책가도에 긴 자가 필요하듯이, 공필화는 수틀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나는 먼저 비단을 수틀에 씌워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한동안 프랑스 자수를 한 적이 있어서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그런 후 도안을 골라 수틀 아래에 테이프로 고정을 하여 비치게 하고, 실크 위에 먹물로 선을 그렸다. 아교포수는 앞과 뒤를 번갈아가며 두 번씩 하였다. 실크는 종이보다 표면이 성글어서 아교 막을 촘촘히 씌우는 듯하였다. 고화처리 비슷하게 바탕색도 입혔다.
채색은 구석에 있는 잎부터 시작했다.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눈에 잘 띄지 않으니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필화만의 기법이 들어가는데, 실크의 앞면에 이어 뒷면도 칠하는 것이다. 잎사귀의 경우 가운데 진한 부분은 앞에서 칠하고 가장자리의 옅은 부분은 뒷면을 칠해서 물감이 스며 나오도록 한다. 그때 밑색이 앞면으로 부드럽게 번져 나올 때의 느낌이 새롭고 신기했다. 이런 기법은 누가 발견한 걸까. 경탄스러웠다.
잎이 다 피어나고, 이제 꽃이 깨어날 차례였다. 하얀색이라 먼저 뒷면을 호분(흰색)으로 칠해서 은은하게 색을 입혔다. 명암을 주기 위해 앞면에서 살짝 어둡게 바림을 하면서 표현했고, 다시 호분을 덧칠하면서 화사하게 마무리하였다. 나비는 도안이 너무 섬세하여 겁을 잔뜩 먹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차근차근 색을 만들어 한 땀씩 수를 놓듯이 정성을 들였더니, 화려하면서도 예쁜 나비가 완성되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다.
공필화 첫 작품, 화접도
나는 하나의 작품을 끝내고 나서, 붓을 놓기가 아쉬웠다. 다시 또 그리고 싶었다. 이건 내가 공필화의 매력에 제대로 빠져들었다는 증거다. 집으로 돌아와 자수를 놓을 때 사용하던 수틀을 찾아냈다. 지난번 작업에서 남은 실크 천을 수틀에 끼웠다. 이번에는 노랗게 열매가 달린 비파나무와 참새를 그려 볼 참이다. 그런데 채색을 하는 과정에서 바탕에 얼룩이 묻었다. 얼른 물붓으로 닦아내자 바탕색이 벗겨지며 얼굴의 버짐처럼 하얀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이런, 다시 또 실수의 시작이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바탕을 하늘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하늘색을 만들어 칠하다 보니, 흰 구름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물붓을 이용해 구름 모양으로 하늘색을 지우고 뒷면에 호분을 발라 앞면으로 스며들게 하였다. 구름이 뭉쳐 있는 가운데 부분은 앞면에서 호분을 바르고 바림을 했다. 구름 표현이 자연스러워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재미가 들려서 여기저기 더 많은 구름을 그리려다 결국 그림이 너무 복잡해졌다. 처음의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 사라지고, 덕지덕지 물감을 바른 듯한 유화의 느낌이 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천이 남아 있었다. 수틀은 없어서 바로 구매를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아교포수를 너무 많이 했나 보다. 조금 진하게 3번을 칠하니까 바탕이 완전히 마르지 않고 끈적거렸다. 나뭇잎도 너무 진해서 어둡다. 하지만 열매가 영글 때면 나뭇잎도 짙어지는 건 당연해서 그냥 두기로 하였다. 나비 대신 비파 열매를 바라보고 있는 참새를 그렸다. 자세히 보니 열매 위에 개미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참새는 열매보다 개미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그린 공필화, 화조도
공필화는 정교하고 섬세한 필법으로 경물을 묘사하는 중국화의 표현 방식이다. 세필화라고도 한다. 공필화는 이미 당나라 때 성장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뛰어난 예술적 완성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회화 기법의 성숙과 함께 회화 재료의 개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비단 재료의 개선은 공필화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반투명의 고운 실크가 자신만의 기법을 탄생시켜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회화의 한 분야를 구축하였다.
민화는 각 단계마다 매번 다양한 기법으로 새로운 세상을 안내한다. 까도 까도 속을 다 알 수 없는 양파처럼 나는 그 매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를 놓을 때 꼼꼼한 성격이 드러나듯이,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공필화에서도 나의 적성을 찾은 듯하였다. 제주는 한겨울에도 제주 수선화와 동백을 피워내며 사시사철 꽃들의 세상을 연출한다. 나비와 새들에게 천국인 제주는 추위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내게도 파라다이스가 틀림없다. 인연은 사람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제주와의 인연으로 만난 꽃들과 나비와 새들을 비단에 담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