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프라하 여행 첫날의 미션을 위와 같이 정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전날 모바일 체크인을 마쳤고 좌석도 지정했다. 오전 비행기라 여유 있게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짐은 작은 캐리어 하나와 개인 배낭을 꾸렸고, 우연히 공항 쪽으로 가야만 하는 택시기사를 만나 공항까지 리무진 비용으로 편하게 달렸다. 비행도 만족스러웠다. 기내식과 독일 맥주는보기 드물게 맛있었고, 옆자리에는 벨기에로 딸을 만나러 가는 나주 아줌마를 만나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할 만큼 친구도 만났다.
그런데 뮌헨 공항에서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우리는 직항인 대한항공보다 비용이 저렴한 독일항공 루프트한자를 이용했기 때문에 뮌헨에서 환승을 해야만 했다.입국심사는 당연히 종점인 프라하에서 하겠거니 마음 놓고 있었는데..
"왜?프라하가 아니고 뮌헨이란 말인가?"
환승으로 주어진 시간은 50여분, 이 짧은 시간에 비행기만 바꿔 타는 것이 아니라 입국심사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검색대를 통과해 들어가야 했다. 절차도 까다롭고, 게이트는 멀고, 찾아가는 길도 난코스였다. 우리는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서 겨우 보딩 시간을 맞췄다. 완전 서바이벌게임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EU 국가들은 한 나라의 입국 시스템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프라하에서는 국내선처럼 아무런 절차 없이 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세상이 바뀐 것을 나만 몰랐다.
이제 숙소까지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우리는 택시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앞으로 프라하는 뚜벅이로 다닐 계획이라 교통 시스템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환승이 가능한 90분짜리 표를 사서 버스에 타자마자 펀치를 찍었다. 지하철 검표원이 우리를 불러 세웠을 때 우리는 당당하게 표를 보여주었고, 여행자를 대상으로 단속하는 무임승차 벌금을 피할 수 있었다. 숙소도 쉽게 찾았다. 트램에서 내려 블타바 강변을 따라 걸으면 되었다. 우리는 정확히 오후 5시, 약속한 시간에 체크인을 마쳤다.
오늘의 미션, 성공적 완수!!
프라하에 가면 가장 먼저 달려가 보고 싶은 곳은 바로 카를교였다. 그러나 블타바 강변의 한인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뮌헨 공항에서의 환승을 포함해버스와 지하철, 트램까지 바꿔 타면서낯선 거리를 헤매며 겪은 크고 작은 긴장감이 한꺼번에 녹아내린 것이다. 집을 나선 지 꼬박 18시간 만이었다. 숙소의 창을 통해 블타바 강을 바라보자 가슴이 몹시 떨렸다. 한시라도 빨리 카를교를 만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숙소 뒷골목의 노천 식당을 찾아가 간단히 저녁식사와체코의 흑맥주 코젤로 프라하 입성을 자축하였다.
코젤은 보기와 다르게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긋하였다."이제부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카를교에 갈 수 있어"라고, 들뜬 마음을 달래는 데는 코젤이 제격이었다.
새벽녘의 블타바 강변
다음날 우리는 시차로 인하여 새벽에 잠이 깼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시차는 오히려 큰 선물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새벽형 인간이 되어발걸음을 죽이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따고 나왔다. 길을 나서자 그제야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밤새 내려앉은 신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는 트램만이 간간이 새벽을 열며 달리고 있었다. 간혹 여흥을 즐기며 밤새 술을 마시다가, 새벽에 문을 닫는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는 취객이 눈에 띌 뿐이었다. 카를교는 숙소에서 블타바 강변을 따라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숙소가 카를교를 지척에 두고 있어서 마음이 흡족하였다.
카를교는 프라하 최초의 다리로 프라하 성과 구시가를 잇는다. 프라하를 동과 서로 나누는 블타바 강 위에 16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교각이 아름다운 돌다리다. 카를 4세에 의해 45년의 축조 기간을 거쳐 1402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지금까지 600년을 넘게 모진 풍파를 견뎌 온 다리다. 아직도 굳건한 이 다리는 먼저 세월의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돌다리를 따라 양 옆 난간에는 30개의 뛰어난 바로크식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나는 그중에 하나쯤 나만의 조각상을 점찍어두고, 틈나는 대로 찾아가 정을 나누리라 작정하였다. 그것은 일주일 이상 머물 예정인 프라하 여행의 작은 재미가 될 것이었다.
카를 4세의 동상이 카를교 동쪽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늠름하고 인자하게 생긴 카를 4세는 14c 보헤미아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체코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쯤 되는 것 같았다. 카를교는 웅장한 고딕 양식의 교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과거 통행료를 징수하기 위해 세워진 교탑은 이제는 전망대로 쓰이고 있었다. 교탑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압도된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아치형 입구로 들어섰다. 돌다리가 카펫처럼 길게 펼쳐진 새벽의 카를교는 무척이나 한산하였다. 간간이 아침운동을 나온 시민과 한낮의 인파에 질린 여행자들만이 새벽잠을 줄이고 카를교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새벽의 카를교와 얀 네포무크 동상
나는 다리 양 옆으로 늘어선 조각상을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며 나아갔다. 드디어 카를교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는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 앞에 다다랐다. 얀 네포무크는 왕비의 외도 고해 내용을 비밀로 지키려다, 바츨라프 4세에 의해 카를교 다리 아래로 순교를 당한 체코의 수호성인이다. 네포무크는 죽고 난 뒤, 5개 별 모양의 빛이 강 위에 떠올라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프라하 성의 비투스 성당으로 모셔와, 은으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다. 머리 위 별 다섯 개의 장식 덕분에 이 조각상은 쉽게 눈에 띄었다.
네포무크의 조각상은 동트기 전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신비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종려나무 가지와 예수의 십자가상을 안고 있는 네포무크의 갸우뚱한 얼굴 표정과 춤을 추듯 곡선으로 휘어진 자태에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인간적 고뇌를 느꼈다. 모진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직업적 신념과 죽음의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며, 죽는 순간까지 “이 다리 위에 선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곳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부조를 만지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나는 닳고 닳아 오히려 황금처럼 빛나는 부조를 만지며,"다시 프라하에 오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동시에 네포무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이 솟아났다. 나의 조각상은 바로 얀 네포무크였던 것이다.
카를교는 날씨와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오전에 구시가를 돌고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카를교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동쪽 교탑의 좁은 계단을 따라 끝없이 올라가 보았다. 꼭대기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낮의 카를교 풍경은 장관이었다. 다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행렬 뒤로 보이는 언덕에는 손에 닿을 듯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이 카를교를 위엄 있게 굽어보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행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와 모델,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와 여흥을 즐기는 관중, 도자기 좌판에서 자신이 만든 오카리나를 연주하며 외로운 남자의 마음을 훔치는 젊은 처녀와 무심하게 지나치는 현지인들까지, 곳곳에 프라하 시민의 삶과 여행자들의 낭만이 그물망처럼 얽히며 수많은 이야기가 피어났다.
카를교는 세상의 중심이 되어 그 미학적 가치를 찾아 모여드는 세계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진정한 다리가 되고 있었다.
프라하 성이 손짓하는 한낮의 카를교
프라하에서의 하루를 마감하는 여유로운 시간,
조명을 받은 카를교의 조각상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행인들을 유혹했다. 아쉬움이 짙은 여행자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카를교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프라하의 야경은 부다페스트, 파리와 함께 유럽의 3대 야경에 꼽힐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카를교와 프라하 성이 함께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풍경은 부다페스트와 파리가 넘볼 수 없는 동화적인 매력까지 발산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명은 더욱 화려해지고, 블타바 강물에 비치는 불빛은 도시 전체가 술에 취한 듯 어른거렸다. 카를교 위로 여행자의 낭만이 켜켜이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