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벽에 프라하 성을 산책하며 비투스 성당과 구왕궁, 황금소로 등의 위치를 확인해두고 다시 숙소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왕궁 아래 귀족들이 살던 네루도바 거리의 집들은 번지수가 없던 시절, 그림이나 조각으로 문장을 만들어서 자신의 집을 표시하였다. 독특한 문장을 찾아보는 재미로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다가, 나는 체코의 국민화가 알폰스 무하가 살던 집을 발견하였다. 놀랍게도 한인 숙소에서 프라하 성 아래로 숙소를 옮겨 머물던 레지던스 바로 윗집이었다. 대문 위 벽에 붙여놓은 무하의 얼굴 부조 아래에는 그의 필체와 함께 그가 그곳에 머물던 시기(1911-1924년)가 적혀 있었다. 100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이웃한 뜻밖의 인연은 앞으로 그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시그널이었다.
알폰스 무하 부조(위)와 여러 문장들
다시 프라하 성을 방문했을 때는 오전부터 폭염이 극성을 부렸다. 하지만 프라하 성의 명소 비투스 성당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의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이어졌다. 와랑와랑한 햇살을 받으며 우리도 긴 줄에 합류하였다. 성 입구의 소지품 검색대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자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라하 성의 중심에는, 완공되기까지 600년의 시간이 걸린 비투스 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고딕 양식의 비투스 성당은 올려다보기에도 목이 뻐근할 정도로 첨탑이 하늘을 찔렀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가득하였다. 사람들에 밀려가며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천정을 높이 올린 실내공간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쏟아지는 오색 빛으로 인해 더욱 장엄하였다.
관람이 시작되는 성당의 왼편 초입에서 나는 알폰스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 ‘성 그리스도와 성 메토디우스’를 마주하였다. 창의 중앙에는 슬라브족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과 성 바츨라프와 성 루드밀라 등 체코인들이 존경하는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무하는 창문 한 장에 체코의 역사를 담아냈다. 다른 것들은 색 유리를 잘라서 만드는 기법인데 비해, 무하의 작품은 유리에 직접 물감을 칠해서 가공하는 기법이라 투명한 수채화의 느낌을 주었다. 그림이 섬세하면서도 색감이 곱고 산뜻하였다. 창문의 테두리를 신비하게 감싸 안은 푸른빛은 자연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다른 색감과 조화를 이루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탄생시켰다.
비투스 성당과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나는 무하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소설 ‘변신’의 작가 카프카의 박물관을 다음으로 미룬 채, 우리는 무작정 무하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트램을 타고 먼저 바츨라프 광장 근처에 있는 무하 박물관을 방문했다. 전시관은 단층으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무하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알폰스 무하(1860-1939)는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 1894년 사라 베르나르 주연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를 그려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달콤하고 감각적인 무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인물과 이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길을 나선 김에 무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프라하 중앙우체국에도 들렀다. 우체국은 무하 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무하의 벽화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었다. 1층 정문으로 들어가 우편업무를 보는 사무실 위로 벽면 가득한 아름다운 그림을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이런 멋진 공간에서 일을 하는 우체국 직원과 체코의 시민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무하는 상업적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슬라브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고 싶었다. 그 결과 말년에 ‘슬라브 서사시’(1911~1928년)라는 20점의 대규모 연작을 완성했다. 아쉽게도 이 그림들은 현재 전시가 안 되어 볼 수가 없었다. 워낙 대작(6m*8m)들이라 전시를 위한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렸다. 나는 대신 구글로 그림을 찾아보았다. 그림은 사진만으로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화폭 가득 슬라브 역사를 관통하며 민족의 화합과 평화를 그리는 교향곡이 웅장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이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저절로 행복해질 것 같았다. 나는 이 걸작들이 전시되는 날을 기념하여 다시 프라하를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아르누보 시대의 작품(위)과 '슬라브 대서사시'(아래)
무하는 슬라브족의 대서사시를 완성하고 나서,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렸다. 왕과 성인들의 무덤이 안치된 최고의 성당에 마지막 혼을 살려 불멸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영광의 시간이 지나고, 무상하게도 무하는 2차 대전 당시 그를 적으로 간주한 나치의 고문 후유증으로 79세에 영면하였다. 세속적 성공을 뒤로하고 조국을 향한 열정으로 체코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알폰스 무하, 그의 숭고한 정신은 체코와 유럽을 넘어 멀리 동방에서 온 남편과 나까지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하의 팬이 되어 그의 예술혼이 묻혀있는 프라하의 옛 성터, 비셰흐라드 언덕의 국립묘지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해서 속세와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묘지는 정원처럼 정돈되어 아름다웠고, 조각으로 장식된 묘비는 모두가 예술작품이었다. 우리는 많은 무덤 속에 퍼즐처럼 숨어있는 무하의 무덤을 찾아내었다. 민족의 정신을 이끈 위대한 예술가 무하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의 수도 프라하를 내려다보며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세월도 무상한 듯, 묘지 아래로는 블타바 강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올해 2월, 무하의 그림들이 서울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남편과 나는 코로나를 뚫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체코 출신의 세계적 테니스 선수, 이반 렌틀이 소장한 230여 작품들이 세계를 돌다 우리나라에 잠시 머무는 중이었다. 작년프라하의 무하 박물관에서 감상한작품보다 많은 수의 그림이었고,관객을 몰고 다니는 도슨트의 설명도훌륭했다. 하나의 주제를 봄, 여름, 가을, 겨울 버전으로 4개의 작품에 담은 사계절 시리즈가 여럿 눈에 띄었다.나는아직 그의 대작 '슬라브 서사시'를 보지 못해 여전히 허전하였지만,언젠가 그것을 보러 프라하에 다시 가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 날을 기다리며 기념품 샵에서 그의 그림이 가득 담겨있는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