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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Aug 23. 2020

잘츠부르크의 애달픈 일몰

오스트리아 렌터카 여행

 


  저녁 6시,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한낮의 태양은 눈에 띄게 시들어갔다. 아침에 체스키 크룸로프를 떠난 남편과 나는 마침내 호엔 잘츠부르크 요새에 올라섰다.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잇는 국가 간 이동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긴 하루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오전에 조금 흥분을 했던 것 같다. 자동차로 국경을 넘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국경을 지키는 군인은커녕 초소나 바리케이드조차 보이지 않았다. 언뜻 작은 유로 표지판을 본 듯은 했다. 너무 시시해서 눈치를 채지 못한 것뿐이다. 허탈해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유럽이 하나의 나라임을 인지한 순간, 휴대폰에 로밍을 허용하겠냐는 긴급 문자가 떴다. 당혹스러웠다. 프라하 하벨 공항에서 유심을 갈아 끼울 때 분명히 오스트리아에서도 통용이 된다고 들었는데, 뭔가 미심쩍었다. 로밍 버튼을 잘못 눌러 요금 폭탄을 맞았다는 얘기를 누누이 들은 터라, 나는 얼른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구글 내비게이션도 함께 작동이 멈췄다. 허걱! 속도로 위로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들며 멘붕이 왔다.


  "주여,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럴 때만 간절하게 신을 부른다. 썩은 밧줄이라도 잡고 싶었다. 자동차엔 내비게이션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다 나침판이 고장 나면 바로 이런 기분일 터였다. 그때 한 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알게 된 정보로 구글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한 게 생각났다. 구글 맵은 렌터카 여행의 구세주였다.


  오스트리아 국경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난 주유소에서 ‘비넷’이라고 부르는 고속도로 통행권을 샀다. 내가 앉은 렌터카의 조수석 앞 유리창에는 체코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비넷이 훈장처럼 나란히 붙었다. 풍경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산의 고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면서 언뜻언뜻 이마까지 백발을 드리운 알프스가 간간이 출현했다. 그제야 국경을 넘었다는 실감이 났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흥얼흥얼 ‘도레미 송’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아름다운 알프스 배경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를 향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카피텔 광장


  잘츠부르크 시내 외곽에 위치한 호텔 ‘맥스 70’에 짐을 풀고, 호엔 잘츠부르크 요새를 찾아 나섰다. 거리가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라 우리는 가볍게 걷기로 하였다. 도중에 거대한 터널을 만났다. 인적이 드물어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지만, 요새를 가기 위해서는 터널을 지나야 만 했다. 터널은 꽤 길고 으스스했다. 터널을 빠져나가서는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여러 번 길을 물어야 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다행히 카피텔 광장에 들어섰다. 거대한 황금 ‘구’ 위에 선 모차르트의 동상이 관광객을 반겼다. 그 뒤로 높이 120m의 호엔 잘츠부르크 요새가 광장을 위풍당당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우리는 페스퉁스반 열차를 타고 요새에 올랐다.

요새는 가히 난공불락의 위치였다. 900여 년 전 독일의 침략을 대비해 세운 후, 나폴레옹 외에는 수많은 전쟁의 참화를 비켜갔다고 한다. 너른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요새는 360도 파노라마 전망을 품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잘자흐 강이 흐르는 시가지가 펼쳐졌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남쪽 방향은 알프스 산맥이 이어졌는데, 천군만마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앞장서서 달려온 백발의 장군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양 옆으로 크고 작은 병사들이 까마득하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레 겁을 먹은 오스트리아가 서둘러 요새를 세워야만 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적당히 거리를 둔 덕분일까? 한가로이 여행을 하는 나그네에겐 알프스의 위용이 장쾌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저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성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중세시대의 무기고와 고문기구, 마리오네트 인형 박물관이 있었다. 적을 향해 겨누고 있는 대포를 지나쳐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을 찬찬히 둘러보려는데,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누군가 호엔 잘츠부르크 요새의 백미는 알프스 전망을 즐기는 것이라고 자꾸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게 풍경은 언제나 여행의 시작이고 끝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제 막 노을이 지려하고 있었다. 서둘러 성 밖으로 나왔다.


  알프스를 바라보기 좋은 노천카페에는 마침 우리를 위한 명당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여유롭게 알프스를 바라보았다. 허파가 크게 열리며 숨이 깊숙이 들어왔다. 박하처럼 청량한 기운이 핏줄기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세포가 하나하나 열리며 그동안 여행으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씻겨 내렸다.


'사형 집행관의 오두막'(좌)과 알프스 전경(우)


  드디어 낮과 밤이 부드럽게 섞이며 화해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달콤한 시간엔 프라하에서 시작된 맥주 사랑을 잘츠부르크에서도 이어나가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흑맥주와 소시지를 앞에 두자, 노을빛이 점차 붉어지며 하늘에서 피아노 소나타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였다. 성곽 아래로 사각형의 너른 잔디밭을 가르며 대각선을 이루는 도로의 교차점에 자리한 하얀 이층 집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한 번쯤 머물며 자전거로 달리고 싶은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아아, 그러나 그 집은 놀랍게도 ‘사형 집행관의 오두막’이라고 하였다. 


  과거 사형수가 마지막 밤을 보내던 곳이다. 사연을 알고 다시 바라보니, 가슴 시리게도 서럽고 서늘한 집이었다. 마지막 날 밤 사형수가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루의 의미는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까? 노을이 타오를수록 가슴에 사무치는 회한과 어둠이 짙어질수록 맹렬하게 달려드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태양은 남은 기력을 다해 지를 지휘하였다.

하늘은 가슴을 에이는 비통한 선율로 변주되었다. 천상의 모차르트가 레퀴엠(진혼곡)의 ‘슬픔의 날’을 연주하는 듯하였다. 통곡하듯 천지사방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구름도 어느새 붉은 옷을 갈아입고 마지막 하루를 애도하였다. 종일 낮 시간을 실어 나르던 태양은 서서히 지평선 위로 지친 몸을 뉘었다. 시간이 멈추며 낮과 밤의 틈새로 영원이 비집고 들어섰다. 우주만물은 드디어 하나가 되었고, 신의 은총처럼 평화가 소복이 내려앉았다. 사형수의 영혼도 안식을 찾은 듯하였다. 나는 먹먹했던 마음을 살며시 내려놓고 가볍게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마지막 페스퉁스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쯔부르크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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