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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Aug 18. 2020

애니 할머니께

체스키 크룸로프, 할머니의 밥상이 그리워요.



  애니 할머니, 안녕하세요?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할머니를 뵌 지 벌써 일 년이나 지나서 저를 기억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작년 6월 남편과 함께 할머니의 펜션 <팬지온 파노라마>에 묵었던 한국 여자 Yoo예요. 오늘 마트에 나갔다가 커다란 수박 사이로 수줍게 숨어 있는 체리를 보았는데,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아침 산책길에 만나 따먹던 선홍색의 체리를 닮았더군요. 문득 할머니가 그리워졌어요.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은 풍선처럼 부푸는데, 코로나 시대가 언제 끝날 지 기약할  없어 가슴이 저릿하네요.  대신 그날의 체스키 크룸로프를 추억하며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 해요. 잠시 저의 넋두리를 들어주시겠어요? 


  할머니를 처음 뵌 곳은 펜션의 주차장이었어요.

남편이 차를 펜션의 아래쪽에 주차하자 그 소리를 듣고 나오셔서 위쪽의 넓은 주차장으로 안내를 하였지요. 그때 미소 지으시던 얼굴은 할머니의 정원에 활짝 핀 작약처럼 환하게 빛이 났어요. 할아버지께서도 정원을 가꾸고 계시다가 우리를 보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시며 손을 흔들어 맞이해 주셨지요. 그때 제가 받은 첫인상은, 어릴 적 자주 달려가던 외할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포근했어요. 먼 길을 긴장하며 달려간 노곤함이 싹 가시며 잘 왔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지요.  


  그날 저희는 프라하 여행의 1부를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떠나면서, 마침 길목에 있는 체스키 크룸로프를 방문하던 참이었어요. 체코 여행에서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체스키 크룸로프를 빼놓을 수는 없었는데, 숙소를 구하다 보니 할머니의 펜션이 평판이 좋더라고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위치해서 전망도 좋을 것 같았어요. 과연 방으로 들어서자, 펜션의 이름처럼 창밖으로 앞산과 마을이 파노라마로 펼쳐졌지요. 블루빛 침대보는 정갈했고 욕실도 어찌나 청결하던지요. 천창까지 있어서 낮에는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고 밤에는 별빛이 쏟아질 테니, 그보다 더 환상적일 수는 없었어요.


팬션에서 바라 본 풍경

     

  그런데 할머니, 그날 저희가 프라하에서 체스키 크룸로프까지 어떻게 갔는지 아세요? 아휴, 말도 마세요. 난생처음으로 외국에서 차를 거든요. 규모가 큰 허츠 렌터카를 이용했기 때문에 사실 큰 걱정은 안 했지만, 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처음은 언제나 설렘 반, 두려움 반 그렇다는 걸요. 아무튼 실수하지 않으려고 직원의 영어 설명에 집중하느라 식은땀이 다 났다니까요. 무사히 계약서에 서명을 끝내고 길을 나서는데, 하필이면 또 비가 쏟아지지 뭐예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더라고요. 운전대를 잡은 남편에게 핸드폰 구글 내비를 읽어주며 긴장을 누그러뜨렸지요. 저희는 장애물 경기에 나선 2인 3각 선수 같았어요. 새로운 길에서 마주칠 고난을 마음 맞춰가며 함께 해결해 나가야만 했으니까요.

     

  우리에게 렌터카는 체코 여행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어요. 하지만 직접 운전대를 잡고 낯선 길을 탐험하는 것은 멋진 일이었지요. 여행의 리모컨을 손안에 쥔 기분이랄까요?  인생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조금씩 자신감이 자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도중에 만난 체코의 시골은 소박하고 평화로워 보였어요. 낮은 구릉 사이로 사이좋게 빨간 지붕이 이마를 맞댄 마을을 바라보는 것은 작은 기쁨이었지요. 참, 체코에서는 낮에도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더군요. 물론 저희도 체코의 법을 따랐죠. 그렇게 3시간을 달려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하였어요.

 

  짐을 올리고 방에서 잠시 쉬다가, 할머니께서 설명해주신 대로 언덕길을 따라 아랫마을로 내려갔어요. 그곳은 몰려드는 방문객의 수만큼이나 펜션들이 즐비하더군요. 하지만 땅이 비좁아서인지 마당과 주차장이 안 보이더라고요. 저는 할머니네 펜션을 선택한 제 안목을 남편에게 은근히 으스댔어요. 물론 남편도 바로 인정했지요. 아무튼 성당과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마을 전체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어요. 가끔은 허물어진 담벼락과 망가진 돌길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도 하였지만, 골목골목 오랜 세월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온기가 배어 있기에 제 마음도 조금씩 열리며 따뜻해졌답니다.


크룸로프 성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크룸로프 성은 언덕 위에 위용을 갖추고 마을을 굽어보며 듬직이 서 있더군요. 남 보헤미아의 영주 크룸로프가 1250년 처음으로 고딕 양식의 성을 지었다지요. 그 후 대를 이어가며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까지 가미되어 성은 마치 건축 박물관 같았어요. 성에서 내려다본 체스키 크룸로프 마을은 동화 속 세상처럼 아담하고 예쁘더군요. 세상이 궁금한 공주가 성을 떠나 마을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을 것만 같았죠. 한편으론 거대한 영화의 세트장 같기도 하였어요. 프라하를 가로지르던 블타바 강이 상류 지역인 작은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를 뱀처럼 구불구불 휘돌아 흐르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한국의 안동 하회마을과도 많이 닮았더군요. 프라하가 체스키 크룸로프로 다시 또 하회마을로, 세상은 그렇게 나의 마음속에서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할머니, 제가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아쉬웠던 게 딱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지 못한 거예요. 그의 그림은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마주하게 하는 마력이 있거든요. 저는 다음날 오전에 '에곤 실레 아트 센트럼'을 가기로 했는데, 월요일이라 휴관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어찌나 아쉽던지요. 모두가 다 제 불찰이지만, 하루살이로 사는 여행자는 다음 날을 살필 겨를이 없어요. 그날처럼 렌터카에 정신을 쏙 빼놓은 날은 더하지요. 하지만 모두 뜻대로 되는 여행이 어디 있겠어요? 아쉬움은 오히려 여행에 여백을 남기고, 다시 또 그곳에 가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요.


  그날 밤 저는 이불에서 뽀송뽀송한 햇살 냄새를 맡으며 달콤한 잠을 잤어요. 나이가 들면서 가끔은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는데, 여행지에서의 잠은 어찌나 꿀맛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여행 체질이라서 그럴까요? 새벽에 일어나 보니, 앞산 중턱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더군요. 어서 나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아 남편과 함께 새벽길 산책을 나갔지요.


  그런데 전날 저녁까지 마을 가득하던 관광객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요? 마을이 고즈넉했어요. 저희는 강가로 내려가서 공원을 거닐다가 신기하게 생긴 암벽이 보여서 발길을 돌렸지요. 아! 그런데 그 암벽 옆의 건물이 바로 에곤 실레가 화실로 쓰던 집이더라고요. 그것은 저에게 완벽한 서프라이즈였어요. 저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정원을 천천히 거닐어 보았지요. 아련히 그의 숨결이 느껴지더군요. 에곤 실레가 숨 쉬던 공기를 호흡하고 나니, 그제야 그의 그림을 못 본 아쉬움이 누그러졌어요.     


에곤 실레의 아뜰리에

 

  흡족한 마음으로 산책을 마치고 펜션으로 돌아가니, 마침 아침식사 시간이더군요. 아담하고 정갈한 식당 안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지요. 저는 갓 구운 빵을 반으로 갈라 버터를 바르고 속을 채웠어요. 그리고 그것을 한 입 베어 문 순간, 바삭한 느낌은 고소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으로 이어졌고 신선한 햄과 치즈의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졌지요. 순간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꼬부랑 허리로 장작불을 피워 만든 가마솥 밥이 생각났어요. 하루 종일 들판에서 친구들과 뛰놀다가 멀리 외할머니 집 부엌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달려가 받아 들던 하얀 쌀밥이었죠. 외할머니의 손으로 무친 찬들은 어린 입맛에도 어찌나 맛나던지요. 저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늘 밥상에서 만났던 거 같아요. 정성이 가득 담긴 밥과 빵만큼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고 영혼을 살찌우는 게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날은 저희가 체코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입성하는 날이었어요.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해서 많이 아쉬웠지요. 남편은 기어이 할머니를 찾아내 함께 사진을 찍었어요. 저는 정원으로 가서 할머니의 미소를 닮은 작약을 카메라에 담았지요.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시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에도 외할머니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체스키 크룸로프를 방문하고 싶어요. 그때는 '에곤 실레 아트 센트룸'도 꼭 방문해야겠어요. 숙소는 두말할 것도 없이 <팬지온 파노라마>지요. 눈도 침침하실 텐데 제 편지가 너무 길어진 것 같군요. 외할머니 생각에 말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럼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2020년 8월,   진심을 담아 Yoo 올림



P.S.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혹시나 해서 전에 예약했던 숙소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의 펜션이 안 보이네요...

처음엔 걱정이 앞섰는데, 이번 코로나 기간 동안 잠시 문을 닫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안심이 돼요. 아무쪼록 무탈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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