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로 렌터카 여행을 준비하던 중, 사진으로 본 호수마을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 여행의 로망이 되고도 남았다.다녀온 많은 이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곳이기도 해서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의심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할슈타트는 처음부터 삐그덕거리며 나의 애간장을 태웠다. 하나 둘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터지면서 크게 부풀었던 마음의 풍선은 구멍이 뚫렸고, 바람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할슈타트는 예뻐하며 가까이다가갈수록 숨겨놓은 가시를 들이대며 사정없이 할퀴는배반의 장미가 되어 갔다.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여행지 중의 하나이다. 오죽하면 중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짝퉁 할슈타트를 만들어 놓았을까? 다들여기만큼은 서둘러 숙소 예약을 해야 한다기에, 느긋하게 여행 준비를 하던 나도 제일 먼저 예약을 서둘렀다. 그러나 역시 늦었다. 겨우 몇 주를 남겨놓고 얼씬거리는 나를 위한 조건 좋은 방은 씨가 마르고 없었다. 할 수 없이 인근 마을인 오베르트라운의 숙소를 뒤졌다. 숲 전망의 합리적인 가격을 내건 호텔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이것도 놓칠세라 얼른 예약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되어 친구를 만나러 나간 남편에게서 카톡이 날아들었다.
"친구들이 할슈타트의 호수 전망 oo호텔이 좋다는데, 우리도 거기서 머물까?"
"어어,..... 그럴까?"
나는 순간 난감해졌다. 숙소에 관해서는 남편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데다가, 숙박비도 꽤나 비쌌기 때문이다. 음.. 어쩐다? 이미 예약했다고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는 통 크게 예약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라, 하루쯤 호사를 누려보지 뭐, 라는 심산이었다.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먼저 예약한 호텔은 환불불가인 상품이었는데 다행히 위약금이 0원으로 떴다. 아하, 당일 취소라 그렇구나, 나는 쉽게 생각하며 안심하고 절차에 따라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앗!그런데갑자기 위약금이 100%로 돌변하는 게 아닌가?
"아~~ 악, 안돼~!! "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오 마이 갓!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벌건 대낮에 날강도를 만난 기분이었다. 숙박비가 만만치 않으니 가만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예약을 취소한 호텔에 바로 Please를 남발하며 "취소는 나의 실수였으니 원상태로 환원해주면 정말 고맙겠다"는 e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은끝에,"그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우리 호텔에 묵고 싶으면 다시 예약하라"는 냉정한 답장을 받았다.아, 그 몰인정함이란,불에 덴 살에 뜨건 물을 부은것처럼 따갑고쓰라렸다. 위약금이 0원이라는 증거를 사진으로 남기지도 못했으니,예약사이트에 항의할 수도 없었다.취소 버튼을 누른 손가락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결국남편이 제안한 oo호텔을 예약하고 나니,숙박비로처음 예상보다 3배가까이 지불한 셈이되었다. 나는 이날 이후 할슈타트 얘기만 들어도 체기를 느꼈고, 속이 쓰렸다.할슈타트는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도도한 할슈타트의 배반이 시작된 것이다.(여행에서 돌아오니, 신문 1면에 숙박 예약 사이트의 환불규정으로 인한 분쟁이 많은데 대부분 소비자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남편과 나는 아름다워서 애달프기까지 했던 석양의 도시 잘츠부르크를 뒤로 하고, 할슈타트를 향해 출발하였다. 전날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로밍 사건은하루 만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곰곰 생각하니, 한국의 통신사가 아니라 유럽의 통신사 보다폰에서 로밍 여부를 물어온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프라하의 하벨 국제공항에서 유심을 갈아꼈으니 그냥 허용 버튼을 누르면 되었는데, 국경을 넘느라 긴장해서당황했고 그래서 바로 로밍 취소 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다시 로밍을 허용하고 스마트폰으로 구글 내비게이션을 켜자, 안개가 걷힌 듯 속이 다후련하였다.
가는 도중에 우리는 먼저 켈슈타인을 들렀다. 켈슈타인하우스는 과거 히틀러의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이마까지 백발을 드리운 장년의 알프스가 무척이나 장쾌했다. 가슴이 뻥 뚫리며, 십수 년 전 스위스의 쉴트호른에서 바라보던 무지막지한 만년설보다훨씬 더 낭만적으로 다가왔다.산지와 평원이 적당히 어우러진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는 산악국인 스위스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고도 때문이겠지만, 날씨도 포근했고 관광객도 더 많았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 대신 트레킹 코스를 이용했다. 얼음을 뚫고 올라오며 생을 찬미하는 야생화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발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그래도 속도를 늦추고 맘껏 여유를 부려본 힐링타임이었다.
켈슈타인의 알프스 전경
낮에 여유를 부린 만큼 할슈타트로 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구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최단코스, 터널을 통과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터널 앞에서 차들이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반대편 차선으로 터널을 빠져나온 차의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뭐라 뭐라 떠들었다. 우리는 터널 안에서 사고가 났음을 직감했다. 곧이어 경찰차가 도착했고, 사고 수습에 두 시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어쩐다? 한 치 앞을 모르고 낭비한 시간들이 야속했지만, 길에서 또 시간을 버릴 수는없었다. 우리는차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구글맵이 안내하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설상가상이라더니,이번에는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이놈의 비는 프라하에서 렌터카를 빌려 출발할 때도 그러더니, 긴장되는 순간만 골라서 들이닥치는 건 또 뭐람. 8시까지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점점급해졌다. 나는 호텔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e메일을 보내고, 남편은 액셀을 밟았다.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 빗속을 달리며 낯선 길을 헤매는 나그네의 심장은 불안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깔리며 까맣게 타들어갔다. 다행히 고개를 넘자, 비가 그치며 무지개가 피어올랐다.무지개를 바라보자 기분이 나아졌고, 마음도 한결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8시가 넘어 도착한 호텔 프런트엔 달랑 이름이 적힌 방키만이 나를 기다리고있을 뿐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8시에 퇴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호텔은 허전하고 썰렁했다.맥이 탁 풀렸다. 먼길 오느라 고생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팠던 것이다.
3층에예약된 방은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좁았지만,테라스에서 호수의 한편이 바라보였다. 그런데 아뿔싸, 우린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뭐야? 우리나라 산정호수가 훨씬 낫잖아?"
밖은 이미 사위가 어둑해지며 음침한 늑대의 시간이 열렸고, 눈이 녹아내린 산은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 채,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래도 한 자락 쥐고 여기까지 달려온 기대가 또다시 배반을 하는구나,라고생각하니 참으로 참담하였다. 실망감이 너무 큰 나머지, 우리는 도저히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호수 분위기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오는 길에 마트에서 사 온 비상용 샌드위치와 샐러드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일찍 잠자리에 눕고 말았다.
할슈타트 마을 산책길
다시 날이 밝았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이미 정이 떨어진 할슈타트를 일찍 떠날 생각이었다.호텔에서 느긋하게 조식을 먹고 있는데,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따사로운 볕뉘와 상큼한 바람이 잠시 나와보라고 우릴 유혹했다. 호텔은 바로 호숫가로 연결이 되었다.우리는 잠시 산책을 나섰다.아침햇살이 눈부시게 호수로 쏟아져 내렸다. 물결은 잔잔했고은빛 물비늘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멀리 호수를 가로지르는 작은 배 한 척이 그림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호숫가 너른 잔디밭에는 부지런한 어미 백조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와한가로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어제와는 완전히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뾰족한 가시는 원래 없었다는 듯이해맑게 청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츠부르크가일몰이 타오르는 시간에가장 아름다웠듯이, 할슈타트는 아침햇살이 호수를 깨우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웠다.어제까지이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이다. 실망으로 닫아 걸린 마음의 빗장이 스르륵 풀리기 시작했다.나는 느린 걸음으로 할슈타트의 아침을 만끽하고 싶었다.호수를 따라 마을을 돌며 호수에 내려앉은 고즈넉한 평화의 기운을 깊이호흡했다.이곳에서 한 달만 살 수 있다면 오래된 영혼의 상처까지 깨끗이 치유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위약금으로 인한 손해는 나의 잘못이었고, 터널 안 사고와 소나기는 우연이었으며, 어젯밤 호수의 모습은 단지 우리가 만난 시간대가 불운했을 뿐인데, 나는 그 모든 탓을 할슈타트에게 돌렸고,편견을 내려놓지 못한 나는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게식어가며 스스로 불행을 택했던 것이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바라보니, 할슈타트는 고즈넉하면서도 진정으로 아름다웠다.아침햇살을 받으며다시금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린나는 나의 기억 속에 박혀있던 배반의 가시를 하나씩 뽑아서 호수에 살며시 띄워 보냈다. 아침의 할슈타트를 만난 건 예기치 못한 커다란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