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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Mar 06. 2021

백서향 향기 가득한 숲

제주 올레길 14-1코스 저지곶자왈



   제주 생활은 사계절  인도하는 삶. 한겨울에도 동백과 제주 수선화가 만발해 발길을 멈추 하니 새봄은 말해서 무엇하랴. 그야말로 정신없이 피어나는 채와  시작해지금  꽃망울이 올라오고 있는 벚꽃이 천지사방 흐드러질 때쯤엔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 또한 즐거운 비명일 터.


  지난주 나는 친구를 따라 북돌아진 오름 계곡을 한바탕 뒤져서 노루귀꽃과 변산바람꽃, 복수초를 실컷 만나고 다녔다. 서울에 남편을 두고 홀로 서둘러 제주로 내려온 이유가 모두 꽃들 때문이었으니, 나의 꽃 사랑은 보통 수준 넘는다 하겠다. 하지만 제주에서 만난 나의 친구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열정으로 숲과 오름을 돌며 야생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홀로 씩씩하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제주도를 누비는 통에 제주 구석구석 모르는 데가 없어서, 나는 그녀를 `마당발이라 부른다. 그런 그녀 곁에 있어 따라다닐 수 있 얼마나 든든한 지 모다.


   친구의 블로그엔 잔설을 뚫고 올라온 복수초가 용트림하며 경이로운 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내가 다녀간 날 계곡 눈 모두 녹아내고  없었다. 대신 가는 초록잎 위로 하나씩 얼굴을 내민 세수초 군락이 노란 융단을 깔아 놓은 듯 만개하였다. 겨우 몇 송이 찾아낸 변산바람꽃은 짙은 색 수술이 하얀 얼굴에 주근깨를 그리 귀엽게 활짝 웃고 있었다. 새초롬이 얼굴을 내민 노루귀꽃은 자매 정답게 모여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 귀를 쫑긋하데, 을 흔들며 올라온 꽃대의 잔털이 보송보송 갓난아기의 솜털을 닮아 더욱 사랑스러웠다.



북돌아진 오름의 세복수초 군락



  다시 아침 햇살이 짱짱하게 밝았다. 며칠 봄비 치고는 많은 양의 비와 거의 태풍급에 달하는 강풍이 불어닥쳐 마음이 움츠러들는데, 오늘은 기분이 한방에 날아갈 정도하늘이 맑고 푸르다. 부랴부랴  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난주 마당발 친구로부터 백서향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내심 마음이 조급던 것이다. 언니는 동네 동생 수진에게도 연락해 우리는 셋이서 함께 길을 나다. 성미 급한 햇살만 먼저 나온 것인 강풍의 여진이 계속되었지만, 우리 발길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시 비 예보가 있었으므로 오늘을 미루면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 테니.


  우리는 오설록 티 뮤지엄에 차를 주차했다. 녹차밭 뒤쪽으로 멀리 올레길 14-1코스의 시작점을 알리는 간세가 보였다. 그쪽으로 발길을 떼는 순간 서귀포에서보다 강한 바람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방심한 사이 언니의 모자가 훌떡 벗겨져 저 멀리 날아갔고, 언니와 동생 동시에 모자를 뒤쫓아 뛰어갔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차에 비치되어 있던 바람막이 옷을 하나 더 걸쳐 입었다.   


  녹차밭을 가로질러 올레길 화살표가 정 코스는 파란색, 역코스 오렌지색으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시작점에 도착했다. 휘파람새가 반갑게 우릴 반겼다. 그곳은 탁 트인 녹차밭과 비밀을 간 숲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이제부터 완전 딴 세상이 펼쳐 곶자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왈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자갈 또는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로, 제주도엔 곶자왈이라 불리는 원시림이 한라산과 오름에서 흘러나온 용암 줄기를 타고 곳곳에 분포한다. 오랜 세월 곶자왈쓸모없는 땅이라 여겨져 버려졌고, 그 사이 식생은 자연스럽게 생존의 법칙에 따라 번성하면서 완벽한 숲을 만들어 갔다. 이제는 제주의 허파로 불리며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통에 몸값이 훌쩍  뛰어올랐다.  

 


백서향 향기가 가득한 저지곶자왈



   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했다. 땅에서 촉촉한 기운이 번져 올랐다. 연속 내린 비에도 웅덩이 하나 만들지 않고 스며들어 길이 뽀송하니 쾌적했다. 현무암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거나 돌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지만, 오랜 시간 조성된 부식토와 이끼가 곱게 덮인 흙은 카펫처럼 폭신하였다. 밤 사이 싱그럽게 피어난 나무 덩굴을 타고 오르는 콩개와 한 몸이 되었고, 돌 틈과 나무둥치까지 파고들며 뿌리를 내린 이끼 꽃을 피우려 꽃대를 들어 올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작은 생명을 피어 올리 경이 감탄하며 우리 따라 몸을 낮췄다. 햇살이 숲을 뚫고 들어온 자리 자연조명을 받은 나무가 존재감을 과시했고, 나뭇잎 여기저기 그림자를 뚝뚝 떨어뜨리 햇살조잘거리며 주변에 영롱한 그림을 흩뿌려 놓았다.

 

  나는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매혹된다. 시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즐겁, 청각과 후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황홀하다. 마다 새봄 되면 내가 백서향이 만발하는 저지곶자왈을 찾는 이유이다. 서로운 느낌의 향기가 난다는 의미의 서향은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하여 천리향이라고도 불다. 설마 꽃향기가 천리를 갈 수 있겠나 싶지만, 나의 기억을 타고 날아온 백서향 향기는 짜로 천리를 날아 서울 냉큼 나를 제주로 데려 정도다.


  곶자왈 초입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서향 향기가 꽃보다 먼저 다가와 우리의 발길을 잡아끌다. 무리 지어 핀 군락에서 시작된 향기는 바람결 따라 르면서 매화향 못지않은  코끝을 간지럽다. 달콤한 향기가 숲 안 가득하다. 하얀 십자 모양의 도톰한 꽃잎은 꿀 바른 듯 윤기가 나서 햇살에 반짝다. 여러 해 살이 백서향나무는 간혹 한송이 우뚝 꽃을 피워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다발로 피워다. 그러다 보면 키가 어느새 성인의 허리춤까지 기도 하고,  훌쩍 자란 나무는 가슴 게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렇게 백서향 향기에 홀려 걷다 보면 중간에 올레 리본을 놓치고 잠깐 길을 잃기 상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인지, 임도를 가로지르며 친절하게 깔아놓은 야자수 매트 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상서로운 향기의 백서향 군락



  숲을 걷는 중간에 동굴을 만났다. 안내판이 이정표가 되어 어 우리는 놓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볏바른궤로 불리는 이 굴은 용암동굴로서 과거 탐라시대부터 제주 4.3 때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간혹 담이라는 돌담이 보여서 사람이 가축을 기르며 산 흔적 있지만, 다시 제주 4.3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려니 가슴이 릿해졌다. 제주의 세월은 수탈의 역사이다. 쌀 한 톨 나오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발버둥 치며 생존해 온 질긴 생명력은, 용암에 뿌리를 박으며 돌과 함께 뒤엉켜 자라난 강인한 숲 곶자왈 똑 닮아 있었다.


  향기에 홀려 걷다 보니 세 시간 훌쩍 넘다. 점심때 한참 지난 시간이라 문도지 오름은 생략해야 했다. 사방으로 시야를 튼 문도지 오름에 오르면 제주도 중심의 한라산 백록담과 비양도를 품은 아름다운 협재 바다와 수월봉, 그리 남서쪽 끝 모슬봉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보일 듯 말 듯 아련하게 제주도의 거의 반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게다가 오름의 언덕에 펼쳐진 초원은 말들의 쉼터가 되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아쉽지만 문도지 오름은 또 다른 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저지리 마을의 밥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불판에 묵은지를 깔고 양념한 흑돼지를 얹은 후 파채와 콩나물, 무나물을 올린 두루치기를 먹을 생각에 마음은 벌써 수저를 들고 있었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용암동굴 볏바른궤
지난 날의 문도지 오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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