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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Mar 21. 2021

심쿵한 별도봉의 봄날

해안 동백 산책길과 벚꽃 정상의 풍경



   도봉은 들어본 적 없는, 아니 정확히는  기억에 없는 오름이었다. 가물거리긴 하지만 수년 전 어느 블로거의 글을 통해 그 존재를 알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당시 서귀포와 사랑에 빠져 있던 내겐 제주시에 있는 별도봉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기에 기억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 내 마음엔 별도봉이 가득하다. 지난주 우연히 별도봉엘 함께 오른 남편과 나는 시원하게 트인 동백 해안 산책로와 봄 햇살을 받고 만개한 정상의 벚나무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다음 날도 먼길을 달려 별도봉을 다시 찾을 정도였다. 날씨마저 화사해서 내 마음에 봄이 그득하니 들어찼다.


  처음엔 사라봉엘 오를 계획이었다. 제주시민들이 사랑하는 사라봉 서귀포 사람도 정도로 유명한 오름이다. 우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사라봉엘 오르리라 작정을 다. 그러나 그동안 몇 번의 기회가 옆구리를 스지만, 늘 시간이 부족하여 다음으로 미뤄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자동차 검사 일정이 잡혔던 것이다. 자동차 검사야 서귀포에서도 할 수 있지만, 차가 노후되다 보니 매연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아무래도 큰 카센터를 찾아 수리도 맡겨야 했다. 그래, 좋아! 꿩 먹고 알 먹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제주시로 가보자꾸나.


  사실 서귀포에 사는 우리는 제주공항을 이용할 때가 아니면 좀처럼 제주시에 나가질 않는다. 한라산을 넘어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우리가 제주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시는 서귀포시에 비해 인구가 3배가 넘는다. 국제공항과 항구를 가진 교통의 요지로 육지와의 왕래가 빈번하다 보니 산업과 인구가 몰릴 수밖에 없다. 자연히 아파트가 많고 교통체증도 심각하다. 게다가 겨울바람은 또 얼마나 드센지 모른다. 우리가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둥지를 튼 이유는 단연코 귀포따뜻하고 한가로운 자연 때문이었다. 춥고 번잡한 제주시는 당연히 우리의 선택지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뒤늦게 제주시를 부러워하게 되었으니, 범인은 바로 별도봉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별도봉의 봄날


  우린 자동차 검사를 받고 차를 몰아 사라봉 주차장을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목적지는 그저 사라봉일 뿐이었다. 평일이라 주차장이 붐비지는 않았다. 오름 주변의 주택가도 한적했다. 신시가의 대단지 아파트를 벗어난 오래된 마을답게 편안하고 안정된 마을이었다. 우리는 동네 맛집을 찾아 늦은 점심을 먹고 사라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름의 경사가 상당히 가팔라서 정상까지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숨이 가빴지만 간간이 반쯤 피어난 벚나무가 반겨주어 힘을 낼 수 있었다. 올해 처음 만나는 벚꽃이었다.


  사라봉은 제주시 최고의 오름답게 많은 이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다수가 주민으로 보여 제주시민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상에는 운동기구가 즐비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들은 건강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척 활기찬 느낌이었다. 우리는 망양각 정자에 올라 벚나무 위로 펼쳐지는 탑동 쪽 서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라봉 일몰사봉낙조(沙峰落照)라 해서 성산일출과 함께 제주도의 영주 10경에 뽑힌다고 한다. 제주시와 바다로 시야가  트였으니  좋으면 사라봉의 이름처럼 비단을 펼쳐놓은 듯 해넘이가 장관을 이룰 법도 했다. 우리는 사라봉을 꽤 괜찮은 오름이라고 평가다.


  사라봉넘어니 예기치 못한 별도봉이라는 오름이 나타났다. 사라봉과 별도봉은 사이좋은 형제처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사라봉을 올랐으면 다시 별도봉을 올라야만 산행이 완성될 것 같았다. 두 갈래 산책길이 보였다. 우리는 먼저 해안으로 뻗은 '장수로'를 선택했다. 오름을 하나 오르내렸으니 이번에는 시원한  바닷길을 먼저 걷고 싶었다. 해안길은 절벽을 타고 이어졌다. 푸르고 투명한 바다가 내리 꽂히며 뒤로는 제주 항구가 넓게 펼쳐졌다. 언젠가 완도에서 오늘 자동차 검사를 받은 차를 배에 싣고 와서 내리 항구였다. 우리가 탔던 커다란 페리오가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는지 항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시로  배가 들고 나는 항구와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보고 걷는 길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길이었다.


   다시 오르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개 위에는 커다란 바위가 걸쳐 있다. '애기업은 돌'이라 하였다. 커란 돌덩이의 한쪽이 튀어나온 것을 포대 두른 아기 엄마로 보는 정서는 제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협재 바다에 그림처럼 떠 있는 비양도에서도 언젠가 같은 이름의 비슷하게 생긴 바위를 본 적이 있다. 별도봉의 '애기업은 돌'은 온통 덩굴로 덮여 있었다. 한겨울 대륙에서 불어오는 제주의 칼바람을 견디려면 무언가라도 아기를 두르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을 터였다.


  고개를 넘으니 동백길이 나타났다. 아직 꽃을 매달고 있는 동백낭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런데 누구의 손길일까? 해안에 설치된 난간 위에 동백꽃이 한 송이씩 얹혀 있었다. 순간 가슴으로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길가에 통으로 떨어진 동백꽃이 발에 밟힐까 가여워 주워 올려놓았을 테지,라고 생각하니 마음까지 따스해졌다. 동백길은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졌고, 새로 떨어진 싱싱한 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자연스레 우리도  주워 빈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장수로는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마음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해안길이었다. 아마도 이쯤에서였던 것 같다. 냉담하던 제주시에  마음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한 것. 


별도봉에서 바라본 사라봉
별도봉의 해안 산책로 '장수로'


  동백길을 마무리하고 별도봉 정상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사라봉의 오르막처럼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숨이 또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오름이 아니던가? 해발 136m인 오름이 제아무리 경사진다 한들 10분이면 오를 수 있는 거리다. 힘을 내어 정상에 올라섰다. 한라산부터 제주항과 원당봉까지 사방으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벚나무도 가득했는데 윗가지를 정리해서 벚꽃 위로 사방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벚나무 꽃배를 타고 너울거리는 바다와 의연한 한라산의 풍광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리의 마음은 확 트인 시야와 함께 활짝 열리고 있었다. 사라봉보다는 소박한 규모였지만 곳곳에 벤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일출의 여명을 맞이하는 것도 멋질 것 같았다.


  하산은 서쪽 길로 잡았다. 최대한 새로운 풍경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여유가 생겼다. 방금 전에 올랐던 사라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사라봉 정상의 망양각 정자가 한결 한가로워 보였다. 내려오는 중간에 눈부게 홀로 서 있는 벚나무를 만났다. 생의 절정을 찬미하는 꽃들의 인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리저리 벚나무 곁을 맴돌았다. 유독 이 나무가 특별히 멋지게 생긴 건 아니었다. 다만 이토록 예뻐 보이는 것은 자신만의 속도로 홀로 꿋꿋이 최선을 다해 생을 꽃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아마도 다음날 이른 아침 다시 길을 떠난 것 바로 이 벚나무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음 날 우리는 어제와는 정반대의 코스로 돌며 별도봉을 맘껏 음미했다. 오현 고등학교에서 바라보별도봉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환상적이었다. 볕이 좋은 동쪽 남쪽 사면으로 팝콘처럼 터진 벚꽃은 새들의 합창과 어우러지며 봄날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다. 숲길로 들어서자 휘파람새까지 반겨주어 절로 흥겹고 행복해졌다. 우리는 느긋하게 동백 해안길부터 돌며 아침의 신선한 풍경을 감상했다. 어제와는 반대로 걷다 보니 오르막길은 내리막길이 되었고, 덕분에 어제 보지 못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백에 홀려 땅으로만 꽂히던 시선이 멀리 구불거리며 올라오는 길 따라 피어난 벚꽃과 하얀 등대가 인도하는 푸른 바다로 확장되었다.


  우리는 어제의 벚나무를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정상에 올라 벤치에 앉아서 아침으로 사과 반쪽씩 나누어 먹었다. 이토록 절묘한 시기에 별도봉을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아무쪼록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불현듯 제주시민들이 부러워졌다. 오름을 이렇게 아름답게 가꾼 제주시의 다정한 손길에 질투가 났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당혹스러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귀포엔 이토록 봄날을 찬미하는 오름이 없는 것이다. 서귀포 시민이 가장 애호하는 솔오름엔 편백나무 군락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즐겨 오르는 보목 마을의 제지기 오름은 소나무만 많다. 사계절 푸른 오름은 그런대로 쓸 만 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설렘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이제 제주시는 더 이상 과거의 제주시가 아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제주시에 이토록 매력덩이 오름이 숨어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가슴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별도봉은 앞으로 분명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생각나고 또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별도봉 벚나무의 속삭임이 한라산을 꿈결처럼 넘어서 나의 가슴을 다시 울렁이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처음 본 순간 속수무책으로 별도봉과 사랑에 빠져 말았다.


나의 벚나무와 애기업은 돌


  다시 서귀포로 돌아와 햇살 좋은 날 이중섭 거리로 나섰다. 시화 벽에 걸려 있는 `제주시 미안’이라는 시 한 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제주시를 동경하던 현유상 시인이 서귀포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깨닫고 제주시에 미안해하는 마음을 담은 시다. 문득 시의 제목이 내 마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나도 따라 패러디하며 중얼거려 보았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제주시 미안


그동안 미안했어

이름을 부르기는커녕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았지


그런데 하필 별도봉 네가 있을 줄이야

너를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너는 어쩜 그리도 순수한 미모를 뽐내며 나를 애태우는 거니?


이제라도 너를 만나 행복해

이제 보니 제주시도 참 예쁜 것 같아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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