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은 지그시 감겨 있었고, 숨 쉬기가 어려워 반쯤 열려 있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딸꾹질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며 가래로 들끓던 목의 썩션 구멍도 거즈로 막아 깨끗하였다. 오랜 시간 뇌경색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감금 증후군에 갇혀 있던 영혼이 날아오르자, 고통을 벗어버린 육신에 살포시 평화가 내려앉았다. 입관식을 하는 동안 가장 크게 오열하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닷새간,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지 못해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한이 되었다. 떠나시는 날 임종을 포함하여 지난 8년간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고도모자라, 단지 닷새의 부재를 자책하였다.
아버지는최근 두 달 동안여러 차례 병원을 들락거리셨다. 코로나로 인해 가까운 병원에 입원이 어려워져 집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소재의 병원에 한동안 입원하셨을 때도 엄마가 달려가 간병을 하였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병원마다 간병 규칙이 까다로워져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엄마는 작년에 허리를 다쳐 골절 시술을 받았기에, 복대를 차고 아버지를 돌보았다. 그런데 허리에 힘이 없어 용을 쓰다가 자궁이 내려앉는 참사가 일어났다. 동생이 부랴부랴 병원을 수소문해서 수술을 받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시고, 누워서 걱정만 하시다가 서둘러 세상을 떠나신 게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엄마의 고생을 눈뜨고 볼 수는 없으셨을 게다.
코로나 시대에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주변에적지 않은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더구나 백신 접종의 속도가 느려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 가는 것은 누구라도 서로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이는 평소에 사전 장례식과가족 중심의 조촐한 장례문화를 희망하던 나와 동생에게 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나는 친구들에게 조문과 부조를 사양하고 마음으로만 명복을 빌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형제가 여럿이다 보니 생각이 다 같지는 않아서 부고의 방식과 범위가 조금씩 달랐다. 그래도 평생 아버지와 돈독한 정을 나누었던 분들을 중심으로 조문을 받으며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된 장례식이었다.
이러한 장례식은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은 아버지를 맘껏 애도할 수 있었고, 또 내가 나의 손님으로 바쁘지 않아서 연로하신 아버지의 친구분들과 가까운 지인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분들은 과거 동창회에 헌신했던 아버지의 공로와 친구분의 자제들에게까지 깊은 관심과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의 애정을 들려주셨다. 타인에게 늘 진심과 성의를 다하는 아버지는 이생의 인연을 허투루 넘기시는 일이 없었다. 평생 주변을 둘러보시며 자신의 일처럼 새벽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 정성이 스며들기를 발원하셨다.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주차장까지 배웅해드리고 다시 식장으로 돌아오자, 제단에 마련된 국화 속에서 아버지가 환하게 미소 짓고 계셨다.
평소 아버지를 따르고 존경했던 한서회 회원들도 조문을 오셨다. 그들은 총무님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투병 중에도 자주 병문안을 오신 분들이라 낯이 익었다. 나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코로나를 뚫고 달려오신 분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버지는 어려서 서당을 다닌 적이 있었기에 한문에는 남다른 능력과 애정을 갖고 계셨다. 나이가 들어 한가해지셨을 때 다시 한문 공부를 시작하면서 한서회 멤버가 되셨다. 어떤 모임이든 강력한 접착체가 되어 회원들 마음의 구심점이 되곤 하시던 아버지는, 회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 살피셨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주셨고, 자라서 학교를 다니면 진로를 안내하고 격려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자상함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빛을 발했다.
일가친척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선도의 명상 지도자로서 조카들의 정신적 지주인 삼촌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면서까지 아버지의 묏자리를 잡아주셨다. 또 모든 장례절차를 세심하게 도와주시며 틈틈이 엄마를 위로하였고, 조카와 조카 손주들까지 챙기며 앞날을 지지해 주셨다. 먹고사는 일로 바빠 밤늦게 도착한 사촌동생은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실 어른을 여읜 것에 대해 심히 애통해하였다. 멀리서 한걸음에 달려온 육촌 동생도 학창 시절 자신에게 쏟았던 아버지의 관심을 그리워하였다. 장지에서 만난 친척 어르신들과 육촌 오빠, 동생들도 모두가 아버지의 애정을 기억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장례식은 부모님께서 사전에 상조회를 들어둔 덕에 상주가 크게 신경 쓰지 않고도 착착 진행되었다. 둘째 날 입관식을 하였고, 입관식 후에는 식사 때마다 제를 올렸다. 발인 날 새벽에도 장례식장을 떠나기 직전 제를 올렸다. 우리는 장례지도사의 지도 아래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애달픈 마음으로 생전에 다하지 못한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장남부터 시작하여 언니와 동생, 조카들, 숙모와 사촌 그리고 엄마에 이르기까지 육성으로 나누는 인사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다들 울컥했지만, 나는 지난날 아버지와의 따스한 기억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정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도 밝게 빛났고, 마치 아버지가 가까이서 귀 기울여 듣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가족 모두의 가슴에 깊이 자리한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기며 추모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발인은 토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주말을 즐기려는 차량이 도로에 즐비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모신 리무진과 가족을 실은 버스는 고속도로의 버스차선을 달릴 수 있어 막힘이 없었다. 그런데 시내에서 선산을 찾아가는 길이 좁고 헷갈렸다. 다들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라 길을 찾기가 어려웠고, 내비게이션에도 잘 잡히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버스가 다닐 수 있는 큰길을 찾아 헤매던 끝에, 마침 육촌 동생이 마중을 나와 무사히 장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남 당진의 외진 시골마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친지들이 모여 살았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고향을 등지고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엔 방학마다 동생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할머니네와 외할머니네를 건너 다니며 신나게 놀다 오곤 하였지만, 성인이 되고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엔 발길을 끊었다. 아버지도 일가친척의 대소사 외엔 특별히 고향을 찾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토록 오래 무심하였지만, 고향은 한없이 너른 품으로 아버지를 맞이했다. 세상을 하직하고 나서 이제야 돌아온 육신을 말없이 거두어주었다. 고향은 만년어머니의 품이요, 인생의 시작점이자종착점이었다.
하관 시간은 오후 1시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덕에 시간의 여유가 생긴 우리는 아버지의 영정을 모시고 아버지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집은 오랜 시간 방치된 탓에 거의 쓰러져가고 있었다. 하지만아직 서까래가 살아있는 대청마루와 깨진 시멘트 사이로 잡초가 올라온 안마당엔 추억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선산으로 향했다.선산은 포클레인이 아버지가 누울 자리를 파느라 분주했지만, 주변은 멋진 소나무가 병풍처럼 감싸고 철쭉이 만개하여 아름답고 아늑하였다. 시야도 탁 트여서 너른 들판 너머로 멀리 서산의 우뚝한 팔봉산이 보였으며, 옆으로는 아담한 동네 산들이 호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일가친척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연로하신 고모부가 지팡이를 짚고 먼길을 달려오셨고, 당숙모들은 농사일로 성한 데가 없는 몸으로갓 찧은 쌀자루와 고춧가루 선물을 이고 언덕을 올라오셨다. 실로 수십 년 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이고 계셨다. 육촌 형제들은 바삐 움직이며 아버지의 하관을 준비하였다. 지관 일을 하시는 당숙께서는 점심도 거르고 아버지의 묏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삼촌과 함께 선산을 기획하고 추진하여 오늘의 자리를 마련하신 당숙께서는 귀가 어두워져 말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셨다.
"당숙, 사랑해요! 당숙, 감사해요!!"
동생과 나는 큰 소리로 당숙께 외쳤다.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으신 당숙께서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우리는 자주 찾아뵙지 못한 송구함과 고마움에 당숙을 더 꼭 안아드렸다. 내 곁으로 육촌 동생 영민이가 다가왔다. 벌써 40을 넘긴 동생은 아직도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자 먼저 자신을 소개하였다. 뜻밖의 반가움에 아버지와의 추억을 얘기해보라 하니, 자신이 어렸을 때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는 얘기만 반복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덕영이도 수줍게 다가와 어린 시절을 추억했다. 벌써 50이 넘은 동생은 아직도 아기처럼 순수했다. 나는 잘 몰랐던 동생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은 기쁨과 함께, 아버지가 생전에 뿌린 끝없는 사랑에 목이 메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네 !
나는 점차 깨달아가고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만난 조문객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평소 자신의 자식과 손주들 뿐 아니라, 수많은 친척과 지인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엄청난 사랑을 남기셨다는 증거를 수없이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기억 속에서 더욱 빛이 났다.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나는 가슴이 요동치며 뜨거워졌다.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 혹자는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지만, 나는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랑의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면서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가르침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심하거나 아니면 다른 가치를 좇느라 바빠서 아버지의 진실된 가르침을 놓치고 있다가, 비통하게도 이제야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사랑의 가르침을 끌어안았다. 이 세상 모든 가치 중에서 사랑만큼 고귀한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부처님은 해탈을 하신 후에도 바로 열반에 들지 않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평생 자비를 베푸셨다. 인간의 사랑이 보통 자신과 가족 안에 머무는 것에 비해, 예수님과 부처님의 사랑은 세상을 모두 포용하셨다. 아버지의 사랑도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끝없이 밖으로 흘러나갔다. 능력이 닿고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시다 마침내 쓰러지셨고, 이제야 편안히 영면하신 것이다.
아버지를 땅에 묻고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나의 마음은 아버지가 이끄는 사랑의 빛으로 충만하였다. 언니와 동생들도 아버지 덕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다. 엄마도 수많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무사히 마치자, 깊은 감회에 젖으셨다. 평생 아버지에게로만 향하던 순애보를 거두고 이제야 주변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아버지의 숭고한 가르침은 우리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자신과 가족 안에 갇혀 있던 사랑의 물꼬를 터서 세상 밖으로 흐르게 하였다. 사랑은 물처럼 흘러야 썩지 않는다.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족으로 흘러서 이웃과 친지를 적시고 점차 세상 낮은 곳으로 흘러나갈 때, 바다를 이루면서 큰 사랑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버지가 생전에 못다 한 사랑을 대신 실천할 마음의 각오를 하였다. 틈틈이 엄마 집에 모여서 아버지를 추모하고, 엄마가 다시 아버지를 만나 반갑게 해후할 때까지 세심하게 위로하고 보살피며, 형제자매들과 우애하고, 시골의 친척 어르신들을 우러르며 틈틈이 방문하여 인사를 여쭙고, 사촌 육촌 형제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으로 아버지가 못다 한 사랑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아버지의 묘소도 자주 찾아가 살피고, 49재 때까지 아버지의 천도를 위한 기도도 각자 게을리하지 않기로 하였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랑으로 세상 낮은 곳을 적실 수 있도록 사랑의 마음을 끝없이 키워나가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